당신에게는 믿음이 있읍니까

청소년 불교강좌

2007-12-04     관리자

 ■이 목숨 마치 때까지

 문) 선생님, 하루의 삶을 염불로 시작하고 염불로 이끌어 가자고 하셨는데, 염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맹목적으로 [나무 관세음보살]이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운다고 재난이 소멸되고 복을 받는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답)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 불교는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수행이 과연 법다와야 하는 것입니다. 법답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로 우리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맞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하기를 권유하는 것은 그것이 불자의 삼대행로인 믿음을 키우는 훌륭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문) 불교는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불교는 자신의 힘으로 성불을 추구하는 자력신앙을 그 본질로 삼는다고 들었읍니다.만일 불교가 절대ㅏ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다면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답) 문제의 핵심을 잘 지적하셨읍니다. [불교가 자력이냐, 타력이냐? 부처님이 신이냐, 아니냐?]하는 논의는 매우 뿌리 깊고 심각한 것이며, 오늘의 한국 불교가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교학상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나는 여기서 세가지 점을 먼저 해명하려 합니다. 첫째, 불교는 기독교보다 적어도 6, 7백년 선행하여 훌륭한 믿음의 종교로서 스스로 발전해 왔다는 역사적 진실입니다.

둘째, 깊고깊은 믿음은 우리들 최고의 염원인 성불을 실현하는 하나의 모체가 된다는 교학상의 진실입니다.

세째, 그런 까닭에 오늘 우리는 이 땅의 불교를 새롭게 개척하교, 성불' 정토화의 서원을 성취하려는 첫 작업으로서 신앙회복 운동을 시급히 전개해야 한다는 현실적 진실입니다.

문) 불교는 처음부터 믿음의 종교로서 출발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답) 그렇습니다. 석가모니 당시 그의 제자들이나 세상사람들이 부처님께 바친 공경과 예배와 신앙은 지금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절대적이고도 감동적인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위대한 법력과 인도인들의 몸에 밴 신앙적 정서가 서로 어울려 부처님, 세존에 대한 실로 경이적인 신심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존을 한 번 뵈옵고 그 무릎 앞에 엎드려 경배 한 번 드리기 위해서, 수백 리 열사의 길을 달려왔고, 재산을 버리고 직위를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읍니다.

이들은 이렇게 세존 앞에 와서 온 몸을 땅에 던져 절하고 이렇게 맹세했읍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대중들에게 귀의합니다. 원컨대 오늘부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세존에 귀의하는 불자로서 저를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이 목숨 마칠 때까지], 실제로 그들은 외도나 횡포한 왕의 폭력으로 목숨을 마치면서도 세존에 대한 믿음을 결코 바꾸지 않았읍니다. 부루나 존자가 그랬고, 목건련 존자가 그랬고, 연화색 비구니가 또 그렇게 죽었읍니다.

[이 목숨 마칠 때까지], [지심귀명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부처님께 돌아갑니다.] 바로 깊고 깊은 이 절대적 신앙이 최초에 확립된 불자의 믿음이고 삼귀의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신앙적 결의입니다.

  ■ 믿음은 성불의 모체

문) 믿음이 이토록 강조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답) 믿음이 성불의 모체가 되는 까닭입니다.

 [성불한다, 깨친다, 해탈한다, 정토를 건설한다 라는 말들은 부처님과 더불어 하나 되고 청정한 부처님 나라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런데 이 성불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흔히 [내가 곧 부처다]라는 식으로 쉽게 얘기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런 발상과 표현은 법답지 못하고 경솔합니다. 본생경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수백 생에 걸쳐 수족을 버리고 몸을 던지는 고행 난행을 감내하고서야 이 세상에 오셨고 역사적으로도 싯다르타는 6년 동안 인류사상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격렬한 고통을 참아내고서야 깨침에 도달하셨읍니다. 그런데 감히 [내가 부처다]라고 어찌 자만할 수 있읍니까.

문) 성불이 그토록 어렵고 고통스런 것이라면 저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읍니까?

답) 그러길래 우리에게는 비상한 신념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정상에 등반하는 산행에도 죽을 각오가 있어야 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고깃배를 타는 어부들도 죽을 각오를 합니다. 들그런데 우리 불자에게 죽을 신념이 없어서 되겠습니까. 온 우주와 뭇 생명의 최고 정상인 성불을 염원하고 이 땅의 사랑하는 형

제들을 위하여 스스로 지옥의 인질이 되기를 염원하는 (爲簫구경-화엄경) 우리 불자들이 자기 희생할 결심을 아니 한다면 이것은 진정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문) 그러시다면 불자의 믿음이란 결국 자기 희생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답) 잘 보았습니다. 성불을 위한 자기 버림의 신념, 몇 번을 다시 와서도 부처님을 찾는 난행고행의 길을 가리라는 염원, 바로 이것이 불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 자시느이 믿음을 [원력(원력), 원행(원행), 발원(발원), 서원(서월)]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구도(구도)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밭이 없으면 씨앗을 뿌릴 수 없듯이, 우리가 아무리 불성, 곧 부처의 씨앗(불동자)을 본래 지녔다 할지라도 믿음의 밭이 없으면, 보리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믿음은 길의 으뜸이고 공덕의 어머니이니라. 믿음은 길의 으뜸이고 공덕의 어머니이니라. 믿음은 일체 모든 착한 능력을 키워, 의심의 그물을 끊고 집착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위없는 길을 열어 보이느리라]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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