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심시심] 칼집에서 칼은 우는데

禪心施心

2007-12-03     이종찬

  스님이다 부처다 하면 우리는 흔히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우선 느낀다.  따라서 선{禪}이라 하면 이러한 정적인 분위기부터 유지되어야 하고 이 선에서 이루어지는 시도 역시 정적인 정감이 담겨야 된다고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행,주,좌,와,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어느 때건 선 아닌 적이 없다면 선이 정적인 분위기만 감돌아야 한다는 생각은 역시 그릇된 집착일 수밖에 없다.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서는 소용돌이의 움직임에라도 내 몸을 내던져야 하는 것이 대자대비의 보살도이다.

  우리는 지난 날의 역사에서 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서슴없이 적진에 몸을 던진 큰스님들을 알고 있다. 왜 이것이 가능했던가? 그것은 [나]라는 집착을 여의었을 때, 소아[小我} 아닌 대아{大我}를 위하는 보살도의 행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조선조 때 미증유의 큰 난리였던 임진왜란이 일자 조용한 산중에서 석장 하나 짚고 적진에 나서 의병을 이끌고 국난을 이겨 낸 스님들이  많다. 그 중의 한 분으로 우리는 사명대사{四溟大師, 催政, 1544~1610}의 공적을 깊이 기리고 있다.

  오늘은 이 큰스님의 치란{治亂], 동정{動靜}, 선속{禪俗}이 조화된 시를 살펴 보기로 한다.

  영내에서 우연히 만난 使臣

  밤 늦도록 함께 듣는 북소리

  임금께서 남쪽 일 물으시면

  흰 머리 늙은 중이

  바닷가 성은 지킨다 하시오.

  師府偶逢天上使 夜深同聽鼓?비聲 聖明?問南邊事 白首山僧戌海邊

  국경의 수비를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는 대사의 자세이시다. 그것도 난리가 끝나 산성을 다시 쌓고 산으로 돌아가면서 지은 시이다. 이러한 각오이기에 그 큰 난리를 극복하고 끝내는 전란의 뒷수습까지 마무리하여 볼모로 잡힌 우리 겨레를 구해 온 것이다.

  흔히 우리의 불교를 호국불교라 한다. 그러나 불교에 호국불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자비의 정신으로 감싸면 어디에나 보호함이 있는 것이다. 내게 있으면 호신이요, 집에 있으면 호가요, 이웃에 있으면 호린(護隣)이요, 나라에 있으면 호국인 것이다.     

  밤 들자 나팔 소리 멎고  

  온 집에 인적도 드물다.

  못 가 풀에 이슬 오르고

  장삼에는 반디도 존다.

  쓸쓸히 앉아서도 말이 없고                                            

  아득히,  대자연의 기미마저 잠드네.

  별은 달을 돌아 산마루에 떨어지고

  잿나무에 새벽 까마귀 난다.

  夜久角聲微 千家人跡稀  露生池館草  螢入定僧衣

  消消坐無語  悠悠漸息機  星廻月?嶺   城樹曙?飛

  적진에 있으면서도 사명대사의 시{詩}의 세계는 항시 선적이시다.

  10월달 남쪽 강 건너는 의병

  호각소리, 깃발은 성을 뒤흔든다.

  한밤에 우는 갑 속의 칼

  요사한 적을 베어 임금께 보답하리.

  十月湘南渡義兵 角聲旗影動江城  ?中寶劍中? ?  願?妖僧報聖明                                                 

  자칫 승이 아닌 장군의 시로 오인할 것이다. 이러기에 명장{名將}이기 이전에 고승[高僧}이요, 고승이기에 명장이었다.

  {국문학, 동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