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그늘에서

보리수 그늘

2007-12-02     관리자

   몇 달 전 이사를 했다. 다행히 한 동네여서 별 문제는 없었지만 살던 곳을 옮긴다는 것처럼 골치 아픈 일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십여 년 한 곳에서 묵힌 살림 도구들을 꺼내어 옮기고 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힘이 드는 작업이었다.
   새로 이사를 해 온 집은 골목 안에 있는데다, 구식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 앉아 있어서 요즘 말로 세도 있는 사람들에겐 관심 밖의 서민촌이라고 해야 옳다.
   골목이 기역자로 꺾이다가 다시 디귿자로 얽히고 다시 리을자로 변형되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대문에 이어지는 골목 안 집은 긴 골목에 비해 짜임새는 제법 괜찮은 편이다.
   반양옥, 이십 년생 단층 건물을 새로 짓다시피 뜯어 고쳐서 단장을 했더니 든 돈만큼은 산뜻해 뵈고 내부 구조도 아파트처럼 편리하게 고쳤더니 식구들이 모두 좋아한다.
   대지가 칠십여 평되어서 크고 작은 정원수가 있고 새로 만든 두 쪽의 화단에는 갖가지 일년생 화초가 무성하다. 도심 주택가에 박힌 집치고는 대지도 넓고 정원수도 여러 종류 있어서 나처럼 뭘 가꾸는데 취미가 있는 사람한테는 썩 걸맞은 것 같이 생각되었다.
   거실 앞의 네 짝 큰문들을 열어 놓으면 하늘을 찌를 것 같이 치솟은 모과나무와 그 옆에 둥그렇게 가지를 늘어뜨린 대추나무가 안길 듯이 다가온다.
   모과와 대추나무 건너편은 앞집의 얕은 기와지붕이 보이고 그 지붕 너머로 파아랗게 트인 가을 하늘이 시원하다. 전에 살던 집은 비록 이층 양옥이었지만, 대지가 좁고 주위의 대형 주택들에 짓눌려 답답하기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얼마나 시원한 집인가?
   대추나무와 모과나무는 늦봄까지만 해도 가지가 꺾일 듯이 열매가 많이 열렸었다. 여름철로 접어들면서 어디서나 떼 지어 날아온 벌들이 이제 겨우 자리를 잡는 모과를 마구 쏘아 댔다. 그리고 몇 차례의 태풍권의 영향 때문에 가지가 휘어지던 대추와 모과가 다 떨어지고 지금은 겨우 명맥만 남은 열매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여름이 가고 가을 끼가 뵈면서 잎 속에 숨어있던 대추알이 토실대기 시작한다. 도심 속에서 대추가 익는 모양을 대하고 보니 마음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타원형 대추알이 검붉은 윤기를 내면서 조금씩 익는 시늉을 해보이자, 대학생이건 고교생이건 모두 코흘리개들처럼 탄성을 지르고 손뼉을 친다.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내 땅에서 결실을 맺는 과목의 신비스러움과 대견함 같은 것들이 아닐까?
   사방이 철벽처럼 막힌 도심에서 뿌옇게 오염된 공기와 수험준비에 찌든 그들의 눈과 피부에 무엇이 닿고 무엇이 튀어 오르는 것일까?
   나는 대추나무 밑에 서서 휘어질 듯이 허리를 제끼고 고개를 꺾는다. 살랑이는 잎사귀 사이로 윤기가 흐르는 대추알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앞이 가물거리면서 먼 추억 속으로 빨려가는 나 자신을 걷잡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의 고향집 가을 풍경이 현실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손때가 곱게 묻은 바가지 가득히 붉은 대추를 따시던 새색시 같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다. 그분도 이미 작고하셨지만……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들이미는 막대기를 심하게 나무라곤 한다. 아껴두었다가 추석에 몽땅 따내자. 그래, 햇대추를 접시에 담아 놓고 제사도 모시고 성묘에 나가서 또 제사를 지내리라.
   추석이 기다려지는 까닭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어린 아이들처럼 설렘을 삼키면서 오늘도 대추나무를 올려다본다. 마냥 연륜이 쌓이는 길목처럼 내 생일이기도 한 추석이 올해는 여느 때와 다른 의미로 나를 더욱 설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