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불교강좌] 니르바나의 경지는 실재하는가 [下]

청소년 불교강좌

2007-12-01     김재영

  <살아있는 자의 기쁨>

  문] 선생님, [사성제{四聖諦}의 멸제{滅諦}란 자유와 기쁨이 넘치는 찬란한 니르바나의 언덕]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니르바나 곧 열반이란 말은 부처님이나 큰스님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 아닌지요? '경봉 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이렇게들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답] 응당 그런 말이 나올 법 합니다. 실제로 우리 석씨문중[釋氏門中}에서는 옛부터 부처님이나 큰 스님의 죽음을 열반이라고 불러왔고, 또 입멸{入滅}, 곧 [滅}의 경지에 드셨다] 라고도 말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 니르바나{Nirvana}, 멸{滅}의 세계는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학설에서는, [석가모니의 죽음은 정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육신이라는 고틍의 덩어리까지 다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죽음이야말로 크나큰 열반, 완전한 열반{般涅槃ㅡ반열반, Parnirvana]이다] 라고 주장하는 수도 있지만, 이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정신과 육신을 다 버리는 것이 니르바나라면 우리 불교는 죽음을 그 이상{理想}으로 찬탄하는 매우 이상한 종교가 되지 않겠습니까.

  도리어 니르바나는 산[生] 자의 것입니다. 나와 당신의, 이렇게 살아 있는 자의 기쁨이며 평화인 것입니다.

  [문]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하여 니르바나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라 하십니까?

  [답] 선재, 지난 번, 니르바나는 곧 멸, 멸진{滅盡}이라 하였을 때, 멸하여 사라지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우리 정신이나 육신, 혹은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을 멸진{滅盡}이라고 불렀습니까?

  [문]아, 아닙니다. 멸진{滅盡}이란 생사 윤회의 원인이 되는 무지{無知,無明}와 번뇌의 멸진이며, 고통의 멸진이라 하였습니다.

  [답]잘 이해하고 있군요. 니르바나는 곧 멸{滅}이기 때문에, {滅}의 정의는 그대로 니르바나의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탐욕이 멸하여 사라지는 것, 모든 성내는 마음이 멸하여 사라지는 것, 모든 어리석음이 멸하여 사라지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니르바나라고 하느니라 ] < 아함경>

  [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멸하여 사라진다는 것은 실제 어떤 경지,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답] 그것은 곧 깨침의 경지를 뜻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에 대한 깊은 믿음과, 부처님과 하나 되려는 성불[成佛}의 신념을 견고히 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힘껏 베풀어 갈 때, 마음을 덮었던 번뇌의 어둠은 점차 소멸되어 가고, 우리의 눈은 밝아오는 것입니다. 장님이 눈을 떠서 코끼리의 참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의 기쁨, 그들의 환회가 어떠하겠습니까.

  [문] 그럼 니르바나에 이른다고 하는 것도 저 장님이 눈뜨는 것처럼, 그렇게 기쁘고 신명나는 일입니까?

  [답] 옳습니다. 니르바나는 저 하늘과 이 땅 위의 모든 생명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신과 인간이 함께 그리워하는 궁극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기쁨의 경지이고, 자유의 경지입니다. 이것은 무한한 평화의 세계이고 영생 불멸{永生不滅}의 세계입니다. 이 경지, 니르바나의 경지에 서면, 삶과 죽음이 둘 아님을 봅니다. 영원과 순간이 둘 아님을 봅니다. 나와 당신이 둘 아님을 봅니다. 저 하늘의 찬란한 별들이며, 거리의 풀 한 포기도 내 생명과 더불어 하나임을 봅니다.

  그런 까닭에 살아서도 기쁨이고, 죽어서도 기쁨입니다. 여기에서도 평화이고, 저기에서도 평화입니다.

  석가모니나 큰스님의 육신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분들이 성취한 니르바나의 세계, 영생불멸{永生不滅}의 세계는 결코 무너짐이 없는 까닭에, 그분들의 육신의 소멸마저를, [열반에 드셨다] 라고 찬탄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능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제 세존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비록 사람이 백 년을 살아도

  니르바나의 길을 보지 못하면

  하루를 살아도 그 길을 보아

  그 맛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느니라.  [법구경 1 14]

 

  <이 소박한 니르바나의 증거들>

  [문]선생님, 그토록 장엄한 니르바나의 세계가 정녕 실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격려하고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일부러 지어 보이신 환상의 세계, 단순한 이상{理想}의 경지가 아닙니까?

  [답]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니르바나는 분명 이 세상에 실재하는 세계이고, 나와 선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구체적인 경지입니다.

  [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희는 니르바나에 이르지 못합니까? 왜 니르바나의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답] 선재, 그 문제에 관해서는 세존께서 목갈라아나에게 들려 주신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벗이여, 그대의 말대로, 니르바나는 엄연히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내가 스승 노릇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니라. 그러나, 제자 중에는 니르바나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그것을 내가 어찌 하겠는가. 나는 오직 길을 가리킬 뿐이니라.                               [증일아함경, 목갈라아나경 ]

  [문]그러시다면, 엄연히 실재하는 니르바나의 경지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그 길을 따르지 못하는 저희들 자신의 문제가 되겠군요.

  [답]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도리가 아닙니까, 선재, 선재가 가고자 하는 명문 대학이 있습니까?

  [문]예, 제가 중학교 시절부터 지망하는 대학이 있습니다.

  [답] 만일 선재가 그토록 염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문] 그것은 물론 저의 노력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답] 옳습니다. 선재가 지망하는 명문 대학이 분명 있고, 열심히 공부하면 능히 진학할 수 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이듯, 크나큰 기쁨과 평화의 경지, 니르바나의 언덕도 분명 저기에 있고, 세존께서 개설하신 니르바나의 길도 정녕 우리들 앞에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의심할 여지 없는 명백한 진실입니다.

  [니르바나의 언덕이 저기에 있다]고 했지만,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들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가 부처님 법{法}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할 때, 니르바나의 작은 기쁨들이 우리 일상{日常}속에 퐁퐁 샘솟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 기쁜 만남, 내가 누리는 이 건강과 조그마한 성공들, 우리 가족의 단란과 우리 마음의 평화,...... 바로 이 작고 소박한 기쁨들이야말로 우리 생활 속에 잔잔히 넘쳐 흐르는 찬란한 니르바나의 소중한 증거들인 것입니다.

  선재;  저회들의 이 작은 기쁨과 행복들이 곧 저 무한한 니르바나의 현실적 증거라시는 선생님의 말씀, 실로 놀라운 기쁨을 금치 못합니다. 영생 불멸의 저 찬란한 니르바나의 경지가 이토록 저희 곁에 가까이 있는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보라誌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