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삼장 법사의 구법 {상}

해외 논단

2007-11-20     관리자

  [1] 서유기의 주인공

  올해는 현장 삼장법사의 1320년忌가 되는 해다. 법사는 서기 664년{당麟德 원년} 2월 5일 입적했다. 그 해는 올해와 같은 갑자년이었다. 현장 삼장법사라 하면 우리들에게 서유기{西遊記}에 보이는 법사님이다. 서유기는 현장 삼장의 대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삼장의 전기인 대자은사 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을 골자로 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많은 부분이 허구이고, 그 가운데 손오공, 저팔개, 사오정 등이 종자로 활약하므로 삼장법사도 이들과 같은 가공인물로 알려지기 쉽다.

  서유기는 16세기에 명{明}나라 오승은{吳承恩}이 쓴 것인데 현장 삼장은 7세기 분이시다. 그 사이에는 900년의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현장 삼장이 경전을 구하고자 천고만신하여 성취한 위대한 공헌을 우리들은 놀라움과 친근감을 거기서 읽을 수 있다. 다들 아는 바와 같이 [삼장 법사}란 경율논 삼장에 정통한 학덕 겸비한 고승에 대한 경칭이다.

  현장삼장이 탄신한 것은 서기 6백년 중국 수{隨]나라 개황{開皇} 22년인데 또는 그 2년후 설도 있다. 낙양에 살던 명문의 4형제 중 막내다. 어렸을 때 부터 유학자인 아버지로부터 고전 강의를 들었는데 아버지는 유교적이었고 어머니는 불교적 정서가 풍부한 분이었다. 둘째 형이 먼저 출가 하였었는데 아우의 소질을 본 형이 절로 데리고 가서 경전독송을 시켰다.

  [2] 특례의 득도

  현장 삼장 13세 때는 수양제{隨陽帝}시대로서 낙양{落陽}에서 새로 27인의 승{僧}을 허가한다고 영이 내렸다. 이것을 득도{得度}라 하는데 학업이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국가에서 승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불교가 성한 때이므로 모집 정원의 수십 배가 넘는 지원자가 모였다고 한다. 득도를 받으려면 20세가 되어야 하는데 13세 소년인 현장이 어떤 사람들이 득도 하는가 분위기를 알려고 전형하는 관청 문전에 종일 서 있었다. 그때 시험관의 한 사람인 정선과{鄭善果}가 현장 소년을 보고 말을 걸었다. 그는 인물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는 사람으로서 평범하지 않은 소년을 만나 말을 걸었다.

  [동자야, 여기서 무엇하지?]

   [저는 언젠가는 득도하여 스님이 되고자 합니다. 지금은 어리고 배운 것도 없어 자격이 없지만 장차 제가 득도할 때를 생각하여 보아 두고자 해서 여기 있습니다.]

  [정말 스님이 되고 싶은가?]

  [그렇고 말고요.]

  [스님이 돼서 무엇할려고? ]

  [부처님께서 남기선 가르침을 세상에 펴고 사람들에게 새 가르침으로서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나이답지 않은 명확한 대답에 정선과는 놀랬다. 그리고 그날의 전형회의 석상에서 여러 시험관들에게 말했다.

   [13세 소년이라 하기 어려운, 얻기 어려운 인물을 추천합니다. 이 사람을 득도시키면 장차 불문의 위인이 될 것입니다. 저런 인물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특례 중 특례로써 인정하여 주십시요. ]

  정선과의 강력한 추천으로 특례가 인정되어 정토사{淨土寺}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름을 현장이라 하였다.

  [3] 佛門 의 천리마

  현장은 섭대승론{攝大乘論}이나 열반경 등 아무리 어려운 경론 강의를 듣고도 자리에서 다 외우고 이해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의 선배 제자들이 강의가 끝난 뒤 현장에게 법상에 오르게 하여 금방 배운 강의를 다시 해줄 것을 청했다. 현장은 주저하지 않고 법상에 올라 일자 알구를 틀리지 않고 강의를 반복 하였다고 한다.

  현장 삼장은 자질이 뛰어나기도 하였지만 거기에 다시 침식을 잊고 공부에 힘썼다. 20세 때에 큰스님들에게서 [너는 석문[釋門}의 천리마{千里마}라 할 만하다. 불법을 다시 밝히는 것은 네게 달렸다.]고 칭찬받았다. 그러나 현장은 깊이 배우면 배울수록 고뇌가 쌓여갔다. 왜냐하면 불문에 들어와서 오늘까지 대덕고승을 만나 배웠지만 해석이 가지가지이고 같은 경전도 번역한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다르므로 어느 것이 정확한 불교인가를 알 수 없어 의문이 겹쳐 갔다. 이런 의문을 풀려면 아무래도 천축{인도]을 가 그곳에서 직접 배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은 경전이 많을 것이다. 또 듣건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란 큰 경론이 있다는데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여 천축에 들어갈 결심만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서 삼장은 천축에 유학할 청원서를 당태종에게 제출하였다. 당시는 당나라가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국내를 다스리는데 힘쓰고 외국과는 왕래를 아주 끊고 있었다. 즉 서쪽으로 옥문관{玉門關} 넘어는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도록 금했다. 삼장의 청원은 각하됐다. 삼장은 두 번 세 번 원서를 냈다. 역시 기각됐다. 삼장은 국법을 어기고서라도 천축에  가기로 결심했다.

  [4] 不東人ㅡ 길을 떠나다

  앞길은 단체로 힘을 모아서도 성공하기 어려운 끝없는 유사지대, 사철 눈을 인 높은 봉우리를 향한 외로운 길이었다. 삼장은 그를 극복할 정신력과 체력의 훈련을 쌓아 자신을 얻었을 때 불전에 나아가 맹세했다.

  [이번 길은 명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제불 보살님 가호를 내리소서. 저는 이번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한 걸음이라도 동쪽을 향하여 걷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것이 부동원{不東願}이다.

  정관{貞觀} 원년 {서기 627년} 8월1일 드디어 장안을 뒤로 하고 서역의 길에 들었다. 옥문관 밖에는 가지 못한다 하지만 우선 옥문관 까지 가는 것이 큰 일이었다. [현장이라는 승이 있는데 서번{西蕃}으로 가려고 한다. 지나는 고을에서는 엄중히 단속하라]는 통보가 돌았다. 법사는 진주[秦州}, 난주{蘭州}, 양주{凉州}, 감주{甘州} 등 여러 고을을 통과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낮에는 사막지대인데 그곳에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5개의 요새가 있었다. 삼장은 그곳에서도 역시 낮에는 사막에 몸을 숨기고 밤이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첫 요새에서 발각되었다. 그곳 지휘관은 왕상[王祥}이라는 사람이었다. 법사를 한 번 보고 존경심을 냈다.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기어코 천축에 가야겠다는 정직한 말을 듣고 왕상은 서역에 가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저도 불법신자입니다. 스님의 뜻은 잘 알겠으나 이곳 지휘관으로서 출국을 눈 감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스님과 같은 훌륭한 스님을 죄인이 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돈황{敦惶} 출신입니다. 거기까지 보내드리지요. 돈황에는 장교{張皎} 법사가 계십니다. 부디 그곳에서 불도 공부에 힘써 주십시요. 부디 그 이상은 서쪽으로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장은 대답하였다.

  [나는 불법을 공부하면서 많은 대덕을 만났지만 이제부터는 천축으로 가서 고승에게 물어야 할 일들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건너오지 않은 경전을 배우고 그것을 가지고 돌아 오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내가 한가롭게 살아가느니 보다 위험을 불구하고 법을 구하고자 떠나는 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가야합니다. 이런 나를 격려하지 않고 어째서 되돌아 가기를 권합니까? 나는 부처님 앞에서 원을 이루지 않고는 동쪽을 향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돈황으로 가면 맹세를 파하게 됩니다. 부처님과의 약속을 파한다면 차라리 밀출국 죄를 주시오. 여기서 죽을지언정 한 걸음이라도 동쪽으로는 못 갑니다.]

  삼장은 확고한 심정을 토로했다.

  왕상은 그 신념에 감동하여 밤늦도록 대접하고, 다음날 왕상 스스로가 백리 길을 나와 전송했고, 그 다음은 네 번째 요새 지휘관인 왕백룡{王伯龍]에 의지할 것을 권하고 눈물로써 작별했다. 이렇게 하여 5요새를 무사히 지나 부동{不東}의 신념에 불타는 삼장은 서역에서 천축으로 구법의 고된 길을 걸었다.

  [5] 하늘과 사막 사이

  거기서 부터는 하늘에는 나는 새도 없고, 지상에는 달리는 짐승도 없고, 물도 풀도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자기 그림자 뿐이다.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돌아온 적이 없는 사막을 지나고 만년설에 닫힌 파밀 고원을 넘어 형언할 수 없는 신고를 겪으며 길을 갔다. 그 동안 한결같이 반야심경을 외우고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천축에 이르러 삼장은 인도 최대의 교학 본거지인 나란타 대학을 찾았다. 거기서 계현{戒賢} 논사를 찾아 유가사지론, 유식론{唯識論}을 배우며 5년간 연찬하여 불법의 밑바닥을 모두 밟았다. 그리고서 서기 645년 봄 657부의 범어경전과 그 밖에 서방의 문물을 실은 22두의 말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18년이 걸린 여행이다. 물론 귀국에 앞서 우전국에서 당 태종황제에게 상표문을 보내어 귀국의 허가를 청했다.

  삼장이 걸은 인도 왕복의 여정은 실로 3만km를 사뭇 넘은 여행이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일본 국토로 말하면 남으로 구주에서 북으로 북해도 까지의 직선거리는 2천km다. 한 사람이 문화의식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발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사막 지대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3만km를 넘는 대여행을 성취한 사람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오직 현장 삼장 한 분 뿐이다.

  현장 삼장보다 2백여 년 전에 중국의 법현{法顯} 삼장이 역시 불법을 구하고자 천축여행을 떠나 성공했다. 이 위대한 선인의 용기있는 행위가 현장 삼장에게 큰 힘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법현은 육로를 걸은 것은 가는 길뿐이었고, 돌아오는 길은 배를 탔다. 현장 삼장은 왕복을 걸었던 것이다.

.  (이 글은 일본 대법륜 제51권 4호의 초역이다.)

  (일본 藥師寺 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