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적으로 칼을 무서워 하는 사나이

윤회의 실증

2007-11-19     관리자

복부에 있는 흉터

1918년에 알래스카 주 「랑겔(Wrangell)」이라는 곳에 태어난 데레크 피트노프(Derek Pitnov)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복부에 배내 흉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청년기에 이르기까지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고 나이 들어가면서 점차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내가 처음 만났던 1962년에도 역시 뚜렷이 나타나 보였다.
나는 1962년 첫 인터뷰 때에 이 배내 흉터를 상세하게 조사해 보았다. 그것은 마름모꼴로 길이가 1인치 가량 되고 폭이 반 인치 쯤 되는데 배꼽 바로 아래 왼쪽으로 1인치 쯤 되는 곳에 있는 것이었다. 피부가 좀 옴폭 파인 것처럼 보이는 배내 흉터인데 그 배내 흉터 밑 부분만이 안쪽으로부터 근육의 지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흉터의 중앙부분이 파여 있어서 1962년에는 그 중심부분을 딴 부위의 피부보다 검어 보였고 그 주변은 반대로 다른 피부보다 약간 얇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데레크 본인 말에 의하면 젊었을 적에는 그 흉터가 지금보다 약 1인치 가량 길었었고 색깔도 훨씬 진했으며, 수영을 한다던가 하여 몸이 차가울 때는 더욱 그 색깔이 진해져서 눈에 쉽게 띄곤 하였다 한다.
이 사람의 경우는 등에는 흉터가 없었다. 복부 오른쪽으로부터 이 흉터 있는 자리를 창(槍)으로 찔렸다면 대동맥을 끊었을 것이기 때문에 곧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자신도 어렸을 적부터 이 흉터가 잇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자기 선로의 신상에 실제로 발생되었던 사건과 관계있는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이로서 1955년의 일이었다.
그해에 이 사람은 자기가 태어났을 때에 랑겔에 살고 있었던 어떤 노부인(老婦人)이, 이 어린아기에게 있는 배내흉터가 랑겔 토착민(土着民) 중의 유명한 인사인「차·닉·쿠(Chah Nikkooh)」가 입었던 치명상과 관련시켜서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극의 역사

「쿠」라는 분은 추장(酋長)은 아니었으나 1852년(혹은 53년)에 시트카(Sitka)에서 거행된 어떤 의식(儀式)에 랑겔 사람들을 인솔해서 갔었던 인물이다. 그때까지는 랑겔과 시트카의 부족들이 오랫동안 부족전쟁을 계속해 왔었던 것이다.
이 의식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평화회의(平和會義)가 되는 셈인데 그 때에 시트카의 추장인 「야크완(Yakwan)」이 평화 선언을 한 것이었다. 랑겔 사람들은 그 평화선언을 받아들였는데, 이 의식이 시트카 측의 계교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시트카에 도착하자 우호적인 환영연이 베풀어졌으며 랑겔 사람들은 무기 하나 없이 이 환영연에 나아간 것이다. 그런데 그 연회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쯤 해서 갑자기 야크완과 그 일당이 창을 들고 랑겔 사람들에게 덤벼들어서 40여명을 살해한 것이다. 몇 명만이 겨우 살아남아서 도망쳐 고향에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18년에 새로운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두 부족 사이에는 반목이 계속되었고 실제로는 오늘날까지도 이 두 부족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 원한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알래스카의 문헌상의 역사책에도 시트카의 문헌상의 역사책에도 시트카의 이 사건이 나와 있는데 그 이상의 상세한 것은 랑겔의 구전(口傳)으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쿠가 이 사건에서 살해되었다고 하는 것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구전에 의하면 야크완이 창을 들고 랑겔 사람들을 죽이려고 대들 때에 그것을 맨 처음 보게 된 쿠가 이렇게 소리쳤다 한다.
「우리 일행을 죽일 생각이거든 나를 먼저 죽여 다오.」
이와 죽게 된 것이라면 당당하게 죽겠다고 용기를 보인 것이다. 그래서 쿠가 제일 먼저 죽고 말았다. 야크완은 창 하나를 가지고 여러 사람을 꼬치 모양으로 꿰어서 죽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살해된 랑겔 사람들의 시체를 돌려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배내 흉터의 내력은?

데레크가 탄생한 것은 1918년이다. 이 참극(慘劇)이 있는지 60년이 지난 뒤였다. 랑겔에 살고 있던 어떤 노부인이 데레크의 배내 흉터가 쿠가 있는 치명상과 같은 장소라고 말한 것은 그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쿠는 데레크의 증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노부인이 쿠의 창상(創傷)과 연결 지어서 말하였다는 이 배내 흉터가 참으로 그러한 것인지를 일단 의심하게 된다.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도망친 사람이 어떻게 그 사람들의 죽을 때의 상처를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 그 시체들조차도 돌려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상처 입은 곳을 알 수 있었겠는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죽음의 상황이라든가 창상의 위치라든가 하는 것은 트린기트의 부족들 사이에 전승되어 오는 특징적인 것이므로 이 말이 전혀 거짓이라고 부정해 버리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흉터가 과연 배내 흉터냐 하는 것을 궁금하게 여기게 된다.
나는 랑겔에서 그 가족 몇 사람들에게 이에 관련하여 면접해 보았다. 또한 앵커리지에서도 그의 누님과 만나보았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 모두 배내 흉터를 기억해 낼 수 없다는 것이고 누님 역시 마찬가지 였었다. 데레크보다 단지 두 살 밖에 위가 아닌 누님의 경우 자기 동생의 재내 흉터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네 살 위가 되는 누님의 경우는 학교 교육 관계로 가족들과 별거했다고 하니까 그가 몰랐다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또한 그 아버지가 나와 만난 것은 1962년 이었는데 그때에는 이미 89세의 노령이어서 기억력이 희미한 편이었다.
게다가 그 어머니 역시 자식에 대한 애정이 좀 박한 편이었다. 왜냐하면 이 양친은 데레크 탄생 1년쯤 되어서 이혼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머니가 아들의 배내 흉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캐물었더니 「내 아들에게는 무릎에 배내 흉터가 있었던 것은 기억에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데레크 본인은 무릎의 흉터에 관해서는 일체 말이 없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기 아들 배에 있는 배내 흉터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은 좀 이상스럽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랑겔에 있는 한 부인(로버트쇼, Robertshaw)은 「데레크는 태어날 때부터 왼쪽 폐 바로 아래 부위에 배내 흉터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쇼 부인은 1962년 당시에 94세의 노령이었다. 그 외의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약간씩 기억에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집작된다.

전생기억은 없어

데레크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쿠에 관한 전생기억 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에 관한 기억도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가지의 흥미로운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쿠의 환생이라고 하게 되면 꼭 그에 상응하는 그런 행동상의 특징인 것이다.
그 한가지의 어릴 때부터 칼이나 총검 또는 창 같은 것에 대해서 남달리 공포를 보이는 것이다. 소련시절에도 다른 소년들처럼 칼장난을 하는 일은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칼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 사람은 군데 입대하였었는데 총검술훈련에는 참을 수 없는 염증을 가졌었다고 한다. 어른이 된 뒤에는 자기 아들에게 칼장난 하는 것을 엄하게 금했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심은 다른 무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그 특징이 된다.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이 사람이 랑겔 태생인데도 시트카 지방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에 퍽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주변 사람들은 랑겔 사람들에게 대해서 일종의 공포심을 가지고 지내고 있었는데도 이 사람만은 시트카에 주거지를 마련한 것이다.
나에게 말하기를 「이 두 지역 트린기트 사람들 사이의 관계 개선과 시트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 나의 강한 희망입니다」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 사람은 시트카 사람들의 문제에 헌신하고 싶은 어떤 심리적 강제요인(心理的 强制要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 대선 노력은 좌절과 실망의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시도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평화교섭을 위해서 시트카에 멀리 가서 죽음을 당한 쿠와의 유사점을 보는 것이다.
그의 칼에 대한 공포증은 식사 때에도 나타난다. 칼을 써야 할 양식을 들면서도 결코 칼을 드는 법이 없이 포크를 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