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신촌 봉원사

古寺의 향기 범패의 요람 ㅡ 새절

2007-11-17     관리자

  [1] 위치와 연혁

  서울 시내, 중앙청에서 사직터널을 지나면 독립문, 독립문을 지나 금화터널을 벗어나자마자 오른편으로 돌아 올라 가면 주위의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 있어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한 그 가운데 한적한 마을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대도시 속의 소음과 공해와는 거리가 먼 별천지에 온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숲이 좋고 물이 좋다. 도심의 중심부인 중앙청에서 약 3km정도, 이 마을 바로 앞에 연세대가 자리하고 있다. 봉원동 山 1번지.

  이 마을 안 쪽에 1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 봉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문 안에 3갈래로 뻗은 괴목{槐木}이 이 사찰 역사의 증인{證人}인 양 우뚝하다. 서울 시수로서 수령 약500년이란다.

  봉원사는 원래 연희궁[衍喜宮} 터 {현재 연새대학교}에 반야사{般若寺}라는 절이 있던 것을 조선조 영조{英祖}때 현 위치에 옮기고 사명{寺名}을 봉원사로 바꾸었다.

  역사를 거슬러 반야사는 신라 51대 진성여왕 3년{889}에 당시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으로 유명한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창건으로 전해진다.

  수 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오는 동안 조선 21대 영조 24년{1748}에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이 왕명으로 현재의 터에 절을 옮겨 짓고 봉원사라 하고 영조는 친필로 현판을 써 보냈다. 이때 부터 절을 새로 옮겨  지었다 하여 주민들 사이에 [새절]로 불리위져 오늘날 까지 새절이라는 이름이 쓰여지고 있는것이다.

  22대 정조 {正祖} 12년{1788}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지도 단속하는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를 두기도 하였으며, 근세에는 개화승{開化僧}이며 정치가인 이동인{李東仁}이 머물면서  개화파의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박 영효{朴泳孝} 등과 친교를 맺고, 고종{高宗} 21년{1884}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산파 역할을 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한국불교의 큰 산맥을 이루고 있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總本山}이다. 太古宗은 고려말  태고보우[太古普愚} 국사를 종조[宗祖}로 하여 1970년 1월에 창종 하였다. 또한 봉원사는 급격한 서구사조의 물결 속에 사라져 가는 전통불교예술의 단청, 불화, 범패의 맥을 이어가는 중요 무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전수 시키는 사찰이기도 하다.

  [2] 중건 중수

  도선국사의 창건 이후, 고려 공민왕 때 태고 보우국사는 이 사찰{반야사}에 주석하면서 승풍을 드날리고, 크게 가람을 일신하고 흥복사{興福寺; 현재 파고다 공원에 있던 절, 후에 원각사]의 삼존불을 모셨다. 당시에 새로 중창된 가람이 너무나 아름답고 정교하여 [동국의 명찰이 한강 북쪽에 있다.] 라는 기록이 전해 온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원찰{願刹}로서 배불{排佛}의 영향을 받지 않고 왕실의 비호를 받았고,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지인{智仁] 스님이 중창하였고, 효종 때는 법당과 요사채 일부가 화재를 당했으나 극령{克齡}, 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그 후 영조 때 현 위치로 옮겼는데 이 때 건축된 대웅전은 못을 전혀 사용치 않고 정교하게 지은 조선조 건축물의 대표적 걸작이다.

  근세에 이르러 건물이 퇴락된 것을 1911년 이보담{李寶譚} 스님에 의해 크게 중수, 1945년 기월{起月},운파{雲坡} 두 스님의 원력으로 염불당을 보수하고 광복기념관을 새로 세웠다. 6,25의 비극은 이 사찰도 예외일 수 없다. 연세대 쪽에서 날라온 포탄은 염불당 광복기념관 등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으며 이때, 보관중이던 영조 친필 현판과 기타 유물들이 모두 유실되었다 한다. 1966년 영월{映月}스님이 대원군{大院君}의 사처{私處}였던 아소정{我笑亭}을 인수하여 그 목재로 현재의 염불당을 복원하였다.

  현재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염불당 칠성각, 극락전 등 대소의 부속 건물이 있다.

  [3] 불교예술의 전수장

  오늘날 봉원사 하면 범패{梵唄}의 중요 무형 문화재 보유 및 전수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범패는 불보살의 위덕을 찬탄, 공양하며, 극락장엄 등등 불교의식 작법의 중심으로서 인도로 부터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신라 [홍덕왕 5년{803]에 진감국사{眞監國師}에 의해 전래되어, 우리나라 3대 성악곡 {범패, 가곡, 판소리}까지 발전된 전통음악의 원류가 되었다.

  범패의 창법은 안채비소리, 훗소리, 짓소리, 화청{和請] 등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음계{音階]를 5선지{五線紙}위에 나타내기가 어려워 현재는 구전심수{口傳心授}되어지고 있을 뿐이다.

  안체비소리는 현재 사찰에서 행하고 있는 염불이라 할 수 있고, 훗소리와 짓소리는 전문적으로 배운 삶, 즉 현재 기능 보유자 및 범패 이수자만이 할 수있다. 또한 화청은 원왕가{願往歌}, 회심곡{回心曲} 등 일종의 염불송{念佛頌}이다.

  범패의 음{音}은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로 된 게송을 그대로 하고 있는데 대개 4언, 5언, 내지 7언 절구로 되어 있어서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일반 대중의 이해 못함은 물론 사찰에서도 의식의 간소화로 보급되지 못하여, 불교 전통음악이 사라져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박송암[朴松庵] 스님{중요 무형 문화재 50호}을 중심으로 범패 전수자{스님}들의 노력으로 봉원사에 옥천법음회{玉泉法音회}를 두고 매일 {오후 6시} 범패 전수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불교음악{범패}을 계승 발전 시켜 나가는데 정열을 쏟고 있다.

  범패 중요 무형 문화재로는 송암스님의 벽응{碧應}, 운공{耘空}스님이 있다.

  또한 단청{丹靑}과 불화[佛畵}로 일생을 정진하신 이만봉{李萬峰} 스님{중요 무형문화재 48}이 사찰에 주석 하시면서 젊은 후진 양성에 심혈을 쏟고 있어 봉원사는 불교 전통문화 예술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독보적 사찰이다.

  꼭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분들의 숨은 노력이 오늘날에 와서는 종교적 신앙적인 차원을 떠나 급변하는 서구 물결의 범람에 한갖 예술 문화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경향이 있어 개탄을 금치 못한다는 이 절 스님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젊은 스님들마저 의식의 간소화에서 오는 몰이해로 범패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때 가슴 아픈 일이다. 생각해 보니, 불교전통 음악인 범패는 확실히 계승발전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고전이 현대로 이어져 전통의 발전을 이루자면 불가불 현대라는 사화상에 적응할 새로운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무엇보다 의식문의 우리말화[平俗化}와 불교의식의 간소화와 대중이 함께 의식 속에 융화되는 의식의 대중화 문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뿌리 내리고 발전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