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3> 14대 달라이라마 즉위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7-11-16     달라이 라마

  며칠 후 더 고위의 탐색이 왔다. 이제 부모는 내가 어떤 승려의 왕생이거니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일이고 집안 형도 그렇다고 증명되어서 나도 동네 절 승려가 입적한 다음 그의 환생을 찾는 정도로 생각했다. 따라서 어린이가 지난 번 생애를 기억함은 보통이다. 글을 몰라도 경전을 암송하고 인물을 알 수 있다.

  내가 하는 언행으로 방문객들은 제대로 찾았다고  단정했다. 그들은 꼭 닮은 흑색 염주 두 벌을 내게 보였다. 그 중 하나가 제13대 달라이 라마 소유였는데 제대로 골라서 목에 걸더란다. 노랑 염주로 시험해도 제대로 집었다.

  다음은 북인데 큰 것은 금줄 장식이고 작은 것은 달라이 라마가 시자를 부를 때 쓰던 작은 북을 들고 염불할 때 처럼 두드렀다. 마지막으로 지팡이는 잘못 골랐으나 한참 생각하더니 제대로 찾았다. 그들끼리는 잠시 당황했으나 사실은 먼저 것도 한 때 쓰다가 남에게 준 물건이었다.

  이들은 이제 성지에 나타났던 석자를 풀어보기로 했다. 아자는 암다라는 지명이고, 가자는 굼분이란 지명, 가와 마를 합치면 마을 산에 있는 절 이름이 됐다. 그 절은 제 13대 달라이 라마가 중국서 돌아올 때 머무른 일이 있다. 온 동네가 경배하느라 찬치가 벌어졌고 그 때 아버지 나이 9살로 달라이 라마 친견을 했단다. 또 달라이 라마는 우리 집에도 들러 잘 지었다고 했단다.

  최종적으로 검토 결과를 수도 라사에 전보로 알렸다. 이때 전신 방법은 인도하고만 교신이 가능해서 차라리 중국을 경유하는 쪽이 빨랐다. 답신도 중국 중계로 왔는데 라사로 데리고 오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이 일대가 중국 관리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묻는대로 대답할 수도 없어 트집 잡히지 않도록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나다를까 중국관리는 후보에 올랐다는 어린이들을 두 번씩이나 불렀다. 자기는 무슬림이지만 시험하겠다고 과자통을 내밀었다. 놀라서 가만히 있는 아이, 욕심대로 잔뜩 챙기는 아이, 그런 중에 나는 1개만 조심스럽게 집었단다. 중국관리는 내가 가장 그럴싸하다고 빼놓고 딴 아이들에게는 부모 옷감을 줘서 보냈다. 그리고 나에게는 형이 공부하는 절로 보내란 결정이 났다.

  겉으로는 그랬으나 중국돈 10만 냥을 요구했다. 엄청난 돈일 뿐더라 터무니 없는 요구였다. 일행은 굴복했다. 또 이번엔 그 세 배를 요구했다. 일행은 내가 확실한 후보도 아니고 전국적으로 물색중이라고 사정을 이야기하면서도 더 이상 낌새를 채고 붙들고 늘어질까봐 적정이었고 더욱 티??통치권을 주장하면 일은 더욱 꼬이게 된다.

  실정을 라사에 보고해야 할 텐데 전보를 의뢰하면  중계할 때 가로채서 안 되겠고 그래서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 처음 찾아나선 때부터 라사로 사람이 가고 오고 2년이 걸렸다.  중국 관리의 농간도 문제였지만 국가에서 공개적으로 다루지도 못할 일이라 더욱 참담했다.

  부모도 확정적 내용을 몰랐고, 어머니는 나를 낳을 때의 이변들을 들려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승이 환생할 때마다 그 지역은 변고를 당한다는 전설이 있다. 내가 출생되기 4년 전, 마을 농사가 우박과 한발로 실패해서 누군가가 이 마을에 환생하겠거니 했단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에서는 재산 중의 큰 몫인 가축이 여러 마리 죽어서 아버지도 영문을 몰라했단다. 나를 낳기 전, 몇 달은 아버지가 몸져 누워 기동을 못했는데 내가 나던 아침에야 일어나 기도하고 장명등유를 손수 부었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게으름 부렸다고 했고, 아버지는 정말 앓았다며 아들이란 소리에 대수롭잖게 출가나 시켜야지 했단다.

  중국관리와 협상을 계속할 동안 나는 절에서 3살이 됐다. 큰 형과 5살 짜리 세째 형이 있었으나 공부 때문에 나는 외톨이였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형들의 교실 밖에서 안절부절하다가 문에 드리운 장막 밖에서 선생님 몰래 형에게 눈치를 주려고 꾀를 피웠으나 엄한 선생님이라 어림없었다.

  삼촌도 있었지만 형도 나도 별로 따르게 안 됐다. 우리나라 사람으론 드물게 털북숭이에 콧수염은 기름칠까지 했고 검게 얼룩진 얼굴에다, 손때 묻은 염주는 보통 이상 크고, 느슨한 끈 때문에 경전은 책장이 뒤섞이고, 한 번은 헝클어놔서 따귀도 맞았다. 이런 때는 형과 도망가서 몇 시간이고 숨었다. 그러나 찾아낸 삼촌이 앞으로 잘 지내자는 타협으로 얌전할 때는 절대 없는 과자까지 주었다. 

외롭고 행복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가끔 형의 선생님이 무릎에 앉혀 놓고 자기 옷으로 덮어주며 말린 과일을 줄 때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누나가 들려 주었는데 혼자 놀 때는 목마에 짐을 싣고 여행놀이였단다.

  1939년 6월초, 진짜 여행이 시작됐다. 중국 무슬림이 메카로 순례를 가는 길에 라사를 통과하니 그 때 갚기로 하고 30만냥을 채우느라 모자라는 액수를 그들에게서 꿔 중국 관리에 주고도 금자 경전과 전임 달라이 라마 의류외 인지 한 명을 남기고 내가 라사에 무사히 도착하면 풀어준다는 조건이었다. 그 볼마는 우리가 떠난 뒤 중국과 분규가 생긴 틈에 라사로  귀환했다.

  3개월 13일을 걸린 여행은 내 4번째 생일의 일주일 후에 시작됐다. 고향을 떠나는 부모 마음은 슬펐다. 집과 밭과 친구를 등지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길이었다. 50여 명 인원과 말과 노새 350여 필은 라사 일행, 우리 가족 또 성지 순례 가는 중국사람들의 이동이다. 우리나라는 바퀴달린 수레가 없다. 길도 없다. 바로 위의 형하고 노새 2마리에 연결된 운반기구에 실려 거칠고 위험한 곳은 라사 사람들이 번갈아나를 업고 안고 날랐다. 통상 우리나라식 여정으로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계속하고 밤엔 천막 치고 야영이다. 처음 몇 주일은 취락을 구경 못하고 이동 중인 유목민만 볼 정도였다.

  중국이 지배하는 영역을 벗어나자 라사에서는 나의 문제를 토의코자 내각을 소집하고 섭정이 지금까지의 경과를 공개했다. 그리고 참석한 전원이 나의 신분을 전임 달라이 라마의 왕생으로 결정하고 마중을 떠났다. 여행 떠난 지 석 달이 돼 갈때 환영 선발대를 만났다. 열 명으로 구성된 인원과 장비에는 도강용 가죽배도 4척 있었다.

  라사에서 보름 걸리는 지점에 또 환영객이 나와 있었다. 여기서 우리나라 전통적 인사의 긴 목도리도 받았다. 또 삼보의 선물도 받았다. 이때야 비로소 부모는 막내가 달라이라마 왕생이구나, 기뻐하며 감사했다. 좀 더 이동하자 라사에서 10번째 역참인데 100여 명의 영접단이 많은 말과 노새를 몰고 와있었다. 일행 속에는 라사의 3개 대찰 대표외 정부에서 달라이 라마라는 공표자료도 준비해 왔다. 농부 옷을 벗고 예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의전비서가 따르는 연을 했다.

  행렬은 점점 장단을 이루며 지나는 마을마다 환영 행사가 거듭됐다. 일부는 행렬에 어울리기도 했다. 퉁소 피리 북 꽹과리 음율에 향 연기가 구름 같았다. 모두 새 옷으로 차려입고 합장하며 기뻐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보였고 가무가 행렬을 이었다. 섭정까지 마중 나오고 여행은 3일간 휴식키로 했다. 영국대표부 대표도 영접 나왔다. 다시 이동이 시작되니 부탄 네팔 중국 대표도 나왔다. 행렬은 멀지 않은 라사까지 연이을 판이다. 국군도 도열하고 시민들이 합세했다. 이제야 좋은 날이 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꿈인가 싶었다. 꽃으로 덮인 공원에 산들바람이 불고 공작이 춤추고 했다. 야생초의 잊을 수 없는 향기에 자유와 행복의 노래가 울렸다. 시내로 전입할 때 까지 꿈이 계속됐다. 꿈속에서 전임자의 웅장한 거실을 지났다. 곧 사자좌에 오르는 의식을 치루기로 했다.

  1940년 1월 14일이 정한 날짜다. 중국 인도 네팔 시킴 부탄에 통보했다. 의식은 포탈라 궁내 동쪽 강당에서 거행됐다. 내외빈 대찰 주지 우리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나의 교수 단장격인 섭정이 나를 인도했다. 모두 기립하고 나는 사자좌에 안내 받았다. 사자 8마리가 2마리씩 걸상다리로 조각되었다. 자리는 오색좌복이 5겹으로 포개졌다. 탁자에는 달라이 라마의 옥새가 있었다.

  포탈라 궁에 상주하는 승도의 송주로 식순 시작, 섭정이 금불상 경전 소형 탑을 삼보의 뜻으로 봉헌했다. 여러 사람들의 목도리를 또 받았다. 나는 답례로 섭정과는 이마를 맞대고, 수상에겐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 다음은 달큰한 초약을 마시라고 들고 왔다. 일반 참석자들에게도 돌렸다. 티??식의 축복의 뜻이다. 다음엔 차가 그런 순서로 돌아갔다. 과자도 나왔다. 이 과정에서 대찰의 고승 2명이 간단한 법담을 했다. 다음엔 음악 반주로 소년들이 무언극을 했다. 다시 법담 중에 과일과 과자가 뒤따랐다.

  섭정이 정부를 대표하여 국무위원과 주지 대표들이 우주를 받든 모형을 기념물로 선물했다. 그는 경과보고 끝에 내가 국가와 교단의 장임을 설명했다. 나에게는 오래도록 백성을 위하고 신앙을 잘 수호하여 달라고 진언했다.

  법륜과 흰 소라를 종교와 국가의 상징으로 받았다. 나는 만조백관에게 축복해주고 선물과 음식을 참석자들에게 분배하라고 일렀다. 다시 무언극이 있었고 바다와 하늘에 있는 신장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나라를 찬탄하는 노래를 불렀다. 고대 인도의 고승으로 분장한 사람이 이 나라의 불교사를 외웠다. 다시 무언극 다음 달라이 라마의 치적이 빛나라는 동사로 식이 끝났다. 나는 시를 낭송한 승려들을 축복해 주고 목도리를 선물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리지만 잘 견디었다고 칭찬해주었다.

  다시 장소를 옮겨 옥새를 누리는 공식적 집무를 시작했다. 내 나이 4살반,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됐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장래가 행복하고 안전하리라 내다 봤다.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