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자비

2007-11-07     관리자

   1.자비는 우정

 불교의 실천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인도의 옛날 수행자들은 혼자 수행했으므로 선인생활이 있게 되었다 .인도의 옛 시나 문예 작품 가운데는 그런 행자가 자주 나온다. 불교도 초기에는 혼자서 수행하는 사람이 많아 그 수행법은 독각이었다. 그러나 수행승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승원이 생겼다. 그 사라믈의 실천은 성문이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 보살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대승인데 대승의 실천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자비는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쓰는 말이나 원래 불교의 말이다. 그 뜻을 더듬어 보면 자비의 자는 인도의 옛말인 <산스크리트>로는 벗의 의미인 마이트리 혹은 마이토우라다. 파아리어르는 <메타>다

 즉 진실한 우정, 진실한 벗 사이에서 실현되는 진실한 마음가짐이다. 한 역에서는 자 또는 자민.자념.자심 이라 번역되고 또는 자비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불교는 원래 무아를 말한다.

 무아란 아가 없다라기 보다 아집을 없앤다는 뜻이다. 아집을 가지고 타인을 상대하면 거리가 생긴다.

 아집을 버리면 거기에 참된 우정이 나타난다.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 열반에 든 것을 슬퍼하여 <나는 아직 할 일이 있는 몸이고 배워야 할 몸이고 마음을 완성하지 못한 자이다. 그런데도 나를 사랑하셨던 스승님은 열반에 드셨다.> 하였다. <25년동안 나는 자애에 넘친 행으로 거룩하신 스승님을 곁에서 섬겼다. 그림자가 몸에서 떠나지 않듯이...>

 대체로 우리의 행은 신구의 3가지 모두에서 진실한 뜻으로 부처님을 섬겼다고 아난다는 말했다. 이 경우에는 <메타>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마음까지 깨끗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쁜짓을 생각하면 그것은 나쁜 행을 한 것이 된다. 불교에서는 마음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중요시 한다. <신구의 삼업으로 전신, 전령을 다하는 부처님을 섬겼다>라 한 것에 인간적인 상하관계나 소속관계를 떠나 진심으로 사람을 받드는 곳에 <자라고 번역되는 본질이 있다. 진심으로 사람을 받든다는 마이토리를 애로 해석하는 사상은 힌두교에서 보이고 지금의 인도에서도 그렇게 쓰일 때가 있다. 나는 베나레스.힌두대학에 자주 갔었는데 세계 굴지의 광대한 대학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태포드대학도 굉장히 넓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베나레스 힌두대학은 끝이 없다고 말을 한다. 과연 끝이 없는지를 모르겠으나 확실히 넓은 대학으로 바깥에서 걸어오면 목이 마를 것이므로 중간에 휴양소가 있다. 거기에는 마이트리.자나파나. 그리하 라고 한다. 자나파나는 물을 마시는 것이고 그리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우정으로서 물을 마시는 휴식소라는 뜻이다. 여기에 마이토리는 보살펴 준다는 뜻이다.

 애라는 말은 법애와 같은 매우 높은 사랑으로 쓰이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단적으로 애를 부정했다던가 장려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 사람은 여러가지 측면을 가지로 있으므로 그에 상응하여 사랑의 나타냄도 적정하여야 만 한다고 할 수 있다.

   2. 비는 보살핌이다.

 자비의 비는 카루나라 한다. 인도의 말로는 보살핌, 동정 등 뜻이 있고 형용사로도 쓸 때도 있다

 이비의 정취는 괴로움을 본성으로 난다고 하며 수사학에서 세밀하게 논의 된다. 그것이 추상명사로 발전하여 쿠루나는 불교에서 대개 비로 번역되지만 때로는그것만으로 자비라 번역된 예도 있다. 어쨌든 마이토리와 카루나는 본질은 같은 것이다. 발고, 여락과 같이 나누어 해석될 때도 있다. 남방상자부 불교에서는 자란 모두와 함께 이익과 안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고, 비는 벗에게서 괴로움이나 불이익을 없애고자 하는것이라고 주석하여 자는 여락이고 비는 발고라고 한다.

   3. 자비와 애

 일반적으로 애정을 의미하는 말은 <스네 - 하>라고 하여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도 스네하인데 이 애정을 프레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이 되면 좀 의미가 달라져 슈랑가라라는말을 쓴다.

 사제지간이나 천자간에서 보이는 사람을 영어로는 모두 <라브>이고 독일말로는 <리베>다. 서양사람의 라브에는 자비와 겹친 점이 있으나 일칭한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의 사랑이란 인간관계에 한정 되므로 아무래도 가까운 것을 사랑한다. 그쪽이 강하게 되는것이 당연한데 자비는 그것을 넘어서 나아가고자 한다. 불교는 그런 인륜적 조직에 상응한 사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에 모물러 있지 않고 사랑의 범위를 사뭇 넓히려고 한다. 무한으로 넓히고자 하는 것은 실제 문제로서 불가능 하지만 이상으로는 널리 넓혀야 한다. 그래서 자비에는 거리가 없다. 인류 역사를 보면 차차 그렇게 되는 것같다.

 옛날에는 어느 민족이나 부족사이에서 서로 죽였다. 문명이 발달하면 죽이지 않는다. 그대신 타 부족과 싸움을 한다.그 관계가 더욱 넓혀지면 밀접한 교섭을 지킬 한 단위가 되엇다. 지금은 같은 민족이 둘로 나뉘어 다투는 실례가 있기는 하나 차차 국제기관이 생기고 언젠가는 지구 공동체란 것이 생길 것이다. 인류가 그것을 목표하는 것이 사실이고 오늘의 국제 연합도 그것이다. 아직 내부에 불합리한 점이 많지만 차차 긴밀한 지구공동체라는 방향으로 발전할 날이 오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때에 불교의 자비정신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자비의 보편성 세계성이라는 성격은 금후 매우 중요하다.

 자비와 애를 비교해 보면 자비는 순수한 사랑이고 보통 사람은 자칫하면 격심한 미움으로 바뀌기도 한다. 인간적 사랑은 미움과 한 배가 되어 있지만 자비는 그것을 초월한다.

   4. 자비는 만인의 것

 자비에 상당하는 마음은 어느 민족에도 있고 존중된다. 그래서 나는 자비에 상당한 산스크리트 원어를 소개하고 서양말에서 이에대응하는 관념도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서양에는 머쉬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서에는 <사랑함>자비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말은 신에게만 속한 것, 어디 까지나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부처님의 자비도, 인간사이에 구현될 자비도 본질적으로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맑혀지고 완전하게 된 것이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원래는 인간이었을 것이므로 거기에는 거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유력한 종교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절대적 단절을 말한다. 신의 사랑, 신의 자비는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 하여 누구에게서나 거룩한 불성을 말한다. 부처가 될수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서나 자비심을 가질수 있다. 여기에 불교의 독자성이 있다.

 중국에 공자의 인과 애와 자비는 자주 대비 되는데 인을 가장 철저하게 말한 묵자는 겸애를 말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5. 자비는 온 누리에

 자비심은 누구에게서나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나나 특히 이것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어머니가 외아들에 대한 애정 같은것이리라. <스타니파아타>에도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자기 외아들에 대하여 기울이는 순수한 애정을 종횡으로 시방으로 넓혀 가라.>이것이 자비의 이상이다. 현실적으로는 될수 없다고 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이 차차 밝아지게 된다.

 ㅖ를 들면 이전에는 불교와 관계가 없었던 미국에서도 좀 다른 형태로 불교를 구하는 움직임이 있고 인도에도 불교가 부흥하고 있다. 베를린 중앙 높은 언덕 위에도 <다루케>라는 의사가 지은 사찰이 있다. 대개 스리랑카계의 불교가 도입되어 있다.

 나는 스웨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해서 스웨덴에 불교사원의 유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서둘렀지만 가보지도 못했고 할 수 없이 서점에서 바이킹의 책을 보고 거기서 불교에 관한 책을 샀다. 다행히 <페루구에> 유적의 사진집도 샀다. 조사해보니 바이킹의 유적에서 불상이 나온 것을 알았다. 그 불상은 서기 6,7세기경의 인도의 것이었다. 이것은 5천마일 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것이 된다. 아마도 제일 먼곳에서 발견한 불상이리라. 뜻 밖이었다.

 불상의 상호는 훌륭하므로 그에 이끌려서 가져 갔으리라. 스웨덴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도 싯달타라는 오페라가 상연하고 있었다. 실제 가보니 <헬만.헷세>의 싯달타가 아니라 부처님의 전기 오페라였는데 전체적으로 서양적이었다. 그래도 부인은 사리를 입었고 남자도 인도풍으로 꾸몄다. 마야부인은 거의 누드형태로 춤을 춘 것은 우습다. 왕성은 감옥같은데 신하인듯한 사람이 뿌리 달린 소의 면을 쓰고 있다. 아마도 바이킹의 영향이리라. 이처럼 스웨덴화 하고 서양화하였어도 이국의 이교도의 이야기를 왕립 오페라하우스에서 상연한 것이다. 지식인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사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웬일일까? 부처님의 자비의 정신에 이끌리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라 하여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