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의 중심사상

지상강단 7

2007-11-06     관리자

 복을 쌓는데는 승방을 지어 스님들로 하여금 일체 반연을 쉬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보다 더 큰것이 없다. 이 기문은 이러한 보시사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재물을 보시하고, 존견을 베풀고, 심지어는 일체 모든 것을 스님들을 위하여 베풀 것을 권장하였다. 왜냐하면 승단은 곧 복전이기 때문이다. 육바라밀 중에 보시가 제일 앞에 놓인 것은 보시를 통하여 모든 복의 열매를 딸 수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 가지 한 개를 땅에 꽂은 공덕으로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다고 하는 말은 매우 유명하며 또 쌀뜨물 한 사박을 가섭스님에게 보시하고 하늘나라에 태어날 복을 지었다고 하는 것도 집착함이 없이 오로지 모두를 베풀 때 그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제7편 서문의 대의 역시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서문이란 전체의 내용을 대변하는 글이기 때문에 비록 작은 문장의 글이지만 각기 서문마다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제목이나 목차는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제목만으로는 그 경전, 그 서적의 대의를 파악할수가 없다. 그러므로 서문이란 내용과 제목을 연결하여 주는 중개역확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 실려 있는 서문들은 거의가 불법의 전래, 불교사상의 근본의미, 교단의 역활 등을 다룬 것으로 치문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제8편의 원문을 보기로 하자. 재미있는 것은 겨우 두편의 발원문이지만 하나는 스님의 발원문이요. 또 하나는 거사님의 발원문이라는 점이다. 혜연스님의 발원문은 수행자들로써 남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수행할 것을 서원하였고, 황태사의 발원문은 참회와 함께 계율을 지켜 모든 재가불자들의 외호를 담당하겠다는 다짐이 깃들어 있다. 하나가 세간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출세간적이다. 결국 두 편의 발원문이 그 정점에 가서는 하나의 원력으로 합일되는데 이것은 치문을 편찬한 자의 편집 기술이라고 보아야 하리라.

 제9편의 선문은 어떠한가? 선이란 여러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글자 그대로 살펴보더라도 일체 잡념을 여의고 단순히 사물 그 자체대로 본다고 하는 뜻이 담겨 있다. 선의 시초는 언제부터이며, 누구에 의해 어떠한 경로를 거쳐 내려왔는가를 설명하고 그 다음으로 좌선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장로자각스님의 좌선의는 너무나 유명하여 선가의 제방남자들이 모두 이 좌선의를 의지하여 선을 수행하고 있을 정도다. 따라서 복이 없고 선근이 얕은 자일수록 세간의 반연을 끊고 부지런히 참선하되 항상 대중들과 함께 수행할 것을 권고 하고 있다. 참선을 권하는 글에서 <대충 대충 불교교리를 아는 법사는 중생을 교화하는 안목이 없고 능력이 없이 거들먹거리는 선개은 수행하는 방법이나 그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느니 이것은 한 쪽으로만 치우친 잘못이다>라고 꾸짖고 <종통 : 선을 닦아 마음을 깨달음 과 설통 :경전을 연구하여 설법이 자재하게 됨 을 함께 닦은 자를 대종사라 하나니 이러한 자는 마치 찬란한 태양이 온 누리를 비침과 같다>고 하였다. 절름발이 수행자들을 일깨워주는 글이라 생각된다.

 제10편의 시중편을 살펴보면, 스님들의 일상생활을 엿볼수 있다. 밥 짓고 빨래하고 농작물을 가꾸고 하는 것이 곧 최상승의 진리와 동렬에 놓임을 착안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일하면서 수행하고 수행하는 가운데 항상 노동하라는 총림의 제도가 발단되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가끔 이런 말을 하는데, 즉 <한 손에는 부처님의 경전을 들고 한 손에느느 신문을 들어라>라고 하는 것이다.

 제11편의 계찬과 제14편의 제현의 송구는 모두 운율적으로 불교를 표현한 것이다. 계찬의 삼보를 찬탄하는 가운데 불법의 참된 면목을 드러냈다고 한다면 제현의 송구는 불법의 참된 면목을 노래하는 가운데 삼보를 찬탄한 것이라 보겠다. 따라서 이 치문은 산문과 시송을 적당히 삽입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그리 지루하지 않게 엮었다는데 또 한 번 편찬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제12편의 호법가운데 한나라 현종이 부처님의 교화를 밝힌 법본내전은 현우경(필자는 이경을 비유의 바다라는 책명으로 번역 하였슴)에 나오는 <여섯명의 이교도 스승>과 비슷한 내용으로써 불교가 중국에 처음들어올때 의 온각 역거을 그린것이다. 당시(기원을 전후하여) 중국의 도가학자들은 불교의 수입을 극구 반대하였으며 마침내 불교의 기적과 도교의 기적을 겨루게 되었다. 여기서 여지없이 무너져버린 도교는 마침내 불교의 그 엄청난 기적에 항복하고 불교의 수용을 잠정적으로 허락하였다. 사십이장경의 명제의 지적까지 곁들여 불교는 가히 신봉할 만한 가르침이라고 하게 된다. 거의가 제왕이나 재상들의 호법정신을 갈무리한 것으로 뒤사람들의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제13편 잡록에서 상나라 총리대신인 희가 공자에게 성인에 관하여 물은 것은 매우 진지하다.

 열자 중니편 제4에 나오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우선 치문에 실려 있는 것의 원문 전체를 번역하여 본다.

 태재(총리대신)가 공자에게 물었다.

 <부자 : 공자를 가리킴 는 성인이십니까?>

 <나는 널리 알고 잘 기억하기는 하지만 성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삼왕은 모두 성인이십니까?>

<삼왕은 지략과 용맹이 출중하여 잘 썼지마는 성인에 대하여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면 오제는 성인이십니까?>

<오제는 인과 의르르 잘 썼다고 하겠으나 역시 성인인지는 나의 알 바가 아니다.>

<그러면 삼황은 성인이십니까?>

<삼황은 때에 걸맞는 정치를 잘하기는 하였으나 성인에 대해서는 역시 나의 알 바 아닐세.>

 태재가 놀라 다시 물었다.

 <그러면 누구를 성인이라 하겠습니까?>

 공자가 안색을 고치면서 잠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들으니 서방에 한 성인이 계시는데 다스리지 않아도 문란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믿으며, 교화하지 않아도 각자 스스로 수행한다네. 너무나도 광대한 그의 위력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이 말을 의거하여 본다면 공자는 이미 부처님이 위대한 성인임을 안것이다. 시절인연이 아직 익지 않았으므로 그저 묵묵히 기억하고, 또 기회가 마침 주어졌기에 말하기는 했으나 그러나 그 이치는 다 말할수 없다.

 열자의 주를 살펴보면 임희일이 부처님을 가리켜 서방의 성인이라 하였는데 혹자는 그말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 비판하고 필경 노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실제 여기서 거론할 바는 아닌 것 같기에 생략한다.

 또 같은 잡록에 우가찬령스님의 삼교총론이 있는데, 이글은 유교. 불교. 도교의 세 가르침이 서로 배타하지 말고 함께 협조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서산대사 휴정스님의 삼가귀감과도 일맥상통한다 할수 있을것이다. 가뜩이나 종교간의 불화가 잦은 오늘날에 있어서 <유.불.선 삼교는 솥의 세발과 같아 어느 하나도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찬령스님의 포용성은 가히 본받을만 하다 하겠다.

 제15편의 전기와 제16편 계고는 하나로 묶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평범한 생활속에서 가끔씩 본연의 자세를 흐트리고 살기가 쉽다. 가령, 예를 들면 말을 잘못하여 남의 미움을 받는다든지 또는 성인의 말씀이 담긴 글을을 아무데나 버려 크나큰 죄를 짓는다든지, 또는 뜻하지 않게 불행을 당한 이웃을 거들떠 보지 않는 둥, ego에 가득찬 현대인들은 가끔 자기중심주의로 살다가 오히려 그것이 자기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법화경을 지극한 마음으로 독송하고 그 인연으로 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게 된 어느 스님의 이야기, 사중의 공공물건을 함부로 사용한 뒤 나중에 갚지 않고 죽어 커다란 재앙을 받은 이야기, 뱀이 죽게된것을 보고 약을 발라 구해 주어 나중에 뱀으로 부터 값진 보배구슬을 얻어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절을 짓고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려 무량한 복덕을 바았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 인과를 밝힌것이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라고 하는 우리의 속담은 이러한 인과사상을 대변하는 주는 좋은 말이기도 하다.

 또 혜가스님이 달마스님으로 부터 참된 도를 깨달아 조사의 자리를 이었다고 하는 말은 계고편에 나오는 것으로 매우 유명하여 <혜가득오수>라는 명구로 표현된다. 또 자기가 지은 것은 반드시 자기가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써 정업불멸을 들고 있는데, 치문의 계고편에서는 서응본기경의 <부처님이 날마다 한 톨의 삼과 한 톨의 보리쌀을 드시고 6년간을 단좌하시다>라는 말을 이끌어 왔다.

 또 스님들이 기적을 나타낸 이야기들을 몇 편 싣고 있는데, 지식만이 팽배한 현대인들에게는 설사 믿기지 않는 일일지 모르나 내용자체로 보더라도 매우 진진하게 엮였다. 실제적인 실화를 엮은 것으로 지공스님이 석장을 날려 암자의 터를 잡았다는 이야기라든가 혜조스님이 석장으로 호랑이의 싸움을 말렸다고 하는 얘기는 우리나라의 고구려 때 비래방장스님의 이야기와 해인사 희랑대의 창건주 희랑스님이 스님들을 못할게 구는 호랑이를 교화하여 타고 다녔다는 얘기와 흡사하다.

 이상과 같이 치문의 중심사상에 대하여 각 항목별로 나누어 자세히 살펴보긴 했지만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다. 자 이제 두번째의 <치문이 출가수행자에게 끼친 영향>으로 넘어가 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