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4> 깨우침의 탐구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7-11-05     달라이 라마

제 2장 깨우침의 탐구

교육은 6살이 되자 전통적 티벳 식으로 시작됐다. 수 세기 동안 내려오는 방법이지만 향학열이나 지적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지금 기준으로 자연과학 결여되는 셈인데 티벳으로서는 완전히 고립된 곳이라 구해 보기 힘든 과목이었다.

근본이념은 폭 넓게 마음을 닦는 목적이고 일반인은 희곡, 무용, 음악, 천문, 작문인데 승려들은 천문이나 작문을 대개 선택한다. 상급 과정은 범어논리학, 반야, 중관, 율장, 논장, 량학 등이고 제일 끝의 과목은 인도철학이고 불교가 아니나 사고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포함된다. 밀교는 별도로 수학한다. 종교적 학문은 심오해서 해득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학생들 교수하는 선생들의 방법도 여러 가지다. 어릴 때 읽고 쓰는 시작은 선생을 따라서 하고, 암기는 경전을 읽힐 때 시작한다.

그 다음은 풀이로 설명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티벳 사찰 교육기간에도 통용된다. 그러나 대부분 사찰에서는 사제간 도반간에 토론식 방법을 택한다. 마지막으로 참선인데 마음을 닦고 신앙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나도 읽고 쓰기로 시작했다. 싫증도 나고 거역하기도 했다. 책과 선생님들 속에서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선생님들이 만족할 만큼은 했다. 보통보다 빨리 배운다는 말도 들었다. 처음 2해는 인쇄체로 읽는 걸 배워 경전을 외우게 했다. 8살이 되자 필기체를 배웠다.

선생님은 내 고향에 나를 찾아왔던 일행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는 남다른 재간이 있어, 분필가루가 묻은 작은 목판에 그가 먼저 쓰고 내가 그 위에 따라 썼다. 처음 시작은 크게 썼다가 점점 작아져 8개월 쯤 되자 종이에 쓰라고 허락했다. 다음은 순법을 배우니 만 5년을 쓰기만 배운 셈이다. 물론 조석으로 종교적 훈련이 집중적이고 글 배우는 일은 지엽적이었다.

12살 까지는 종교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지 않았다. 쉽지도 않았고 속으로 저항심이 6년 전보다 더 심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차차 사라지며 학과가 마음에 들었다. 열심히 해서 토론에 참가하게 됐다. 나는 반야부부터 시작했는데 주석서만도 30권 이상이고 출제하는 범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싱하마드라와 제 5대 달라이 라마의 저술을 선택했다. 매일 1페이지의 3분의 1씩 정독하고 암기해 나갔다. 처음으로 기초 논리학의 토론이 시작돼서 대찰의 학승들이 나를 도왔다.
13살 되던 때 8월, 대찰 두 곳에 참여해도 된다고 허락받았다. 이 때 부터 두 사원의 토론에 자주 참석했다.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하는 일이라 부끄러웠고 흥분도 돼서 두려웠다.

상대는 박식한 주지고 수백 명이 증명하고 수천 명이 참관했다.
불교는 정적이라기보다 지적인 종교다. 내가 배운 경전은 극히 일부라 하나 그럴 것 같다. 13살이 되면 배운 논장은 돌에 맞은 머리처럼 정신 차릴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다른 과목 배울 때처럼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인도 사람들의 「익숙하면 어려움이 없다」는 말처럼 이 공부도 그랬다. 하나 하나 교과가 늘었다. 가르치는 대로 배울수록 덜 어려웠다. 또 좀 더 알고 싶은 것도 늘었다. 예습을 진도 이상으로 나가서 나이에 비해 빨랐다.

지적 개발은 본인의 마음에 달렸다. 학과가 높을수록 몸과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8살 때부터 들인 습관으로 난관을 잘 극복했다. 행사 참석도 침착해졌다. 신앙심도 깊어지고 굳어갔다.

경험을 쌓으며 15살이 되자 부처님에게 감사할 따름이고 인도와 우리나라의 많은 고승대덕에게도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존재가 미미해지며 자비라는 뜻을 알만 했다. 이런 정신적 승화가 지적 단련을 집중시켜 학문토론 마음조섭 등으로 커 갔다.

뒤에 말하겠지만 정치와 여러 가지 경이 나로 하여금 신앙과 학문에만 전년하게 두지 않았으나 13년간은 그런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24살이 되자 3대 대찰에서 예비고사를 쳤다. 이 시험은 공개토론인 데 매우 장중했다. 수험생은 많은 출제자의 질문이 뭐가 될지 알 수 없었다. 5과목씩 3사람이 물었다. 그 다음 단계는 주지 2사람 앞에 5과목을 통과해야 했다. 틀림없는 지적 전투였다.

1년 후 마지막 시험은 정초 행사 중에 있었다. 아침부터 인도 논리학으로 시작해서 30명이 질의 했다. 오후는 그 반수가 중관과 반야를 물었다. 저녁에는 35명이 율장과 논장에 대하여 질의했다. 시험장소에는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 외에 수천 명이 방청 중이다. 무척 어려웠다. 문제를 잘 알아야 정답이 나올 텐데 최종 시험이라니 기쁘기도 했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답변할 짬이 모자라는 기분이었다. 부처님을 다 배운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깨우칠 때까지는 공부의 끝이 없다.

그러나 종교적 수학기간을 통하여 얻은 바는 마음을 가라앉히게 됐다는 덕으로 고통스럽거나 슬플 때도 잘 극복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충격으로 자포자기 한다면 남까지 불행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 중생을 구한다거나 인도주의는 신앙심에서 우러난다. 어떠한 종교라도 평화로운 마음이요, 그 세계다. 마음속에 평화가 없다면 남에게 전달될 수 없고 나라 사이에도 평화로운 관계가 없다.

달라이 라마로서 이야기 해야겠는데 우리가 부닥친 난관에 신앙은 나와 백성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우리는 중생의 윤회를 믿는다. 한갓 생의 고락은 과거의 인과다. 물론 지금 열심히 노력해서 바꿀 수 도 있다. 업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윤회할 것이 아니라 해탈을 해야 한다. 그것이 깨우침이요, 부처다. (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