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살아있는 명법문

2007-11-04     관리자

【 맑고 .청정한. 근본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매일 하루하루 정진을 하고 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 깨달음을 알고 사는 사람은 분명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님이 되셨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도 범부일 적에는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어요. 갖가지 욕망에 대해서, 또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별심에 의해서 괴로움을 겪은 거예요.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생을 보다 맑고 행복하게 또 사람답게 바르게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보니까, 인간의 육신은 참된 ‘나’와 거짓 ‘나’ 가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 참된 ‘나’ 는 마치 가을하늘처럼 맑고 깨끗하며, 연꽃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청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된 ‘나’의 성품으로 살지 못합니다. 갖가지 욕망겳壤�때문에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깨달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처님처럼 맑고 여여한 가을하늘 같은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맑은 물과 흙탕물을 비교해보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은 깨끗하고 투명해요. 하루 종일 흔들어도 맑은 물입니다. 그 이튿날 또 흔들어도 맑은 물이예요. 물은 흔들릴지언정 맑은 성품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흙탕물은 가만히 놓아두면 흙이 가라앉아 맑은 물로 보이는데, 흔들면 온통 흙탕물이 돼요. 또 가만 놓아두면 맑은 물이 되고, 흔들면 다시 흙탕물이 됩니다.
흙탕물은 중생의 마음이고, 맑은 물은 깨달은 성자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좀 하고나면 마음도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공부가 좀 됐지 않나 싶은데, 누군가가 와서 속이 뒤틀린 말을 하면 온통 그 마음이 뒤집어지고 화가 나고 증오심이 나고 상대방에 대한 적대심이 막 일어나죠. 마음이 온통 구정물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구정물도 됐다, 맑은 물도 됐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근본 마음을 보지 못하면, 흙탕물처럼 조금 맑았다가 조금 흐려졌다를 계속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본 마음은 가을하늘처럼 맑고 청정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맑고 청정한 마음에다 끊임없이 생각을 일으켜 그림을 그려요. 이 생각도 했다 저 생각도 했다, 좋은 생각도 했다 나쁜 생각 했다 그럽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시작해서 밤에 잠잘 때까지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생각이 끝나면 또 다른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범부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한 성인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어요. 그럴 때 성인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어떠한 생각이 맑고 청정한 내 마음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구나’ 하고 전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 즉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그림자로 보지 않고 실체로 봅니다. 그러니까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또 괴로움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래서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백지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고뇌가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맑고 청정한 마음 바탕에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그림자로 보고 속지 않으니 고뇌가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시시때때로 일으킨 생각을 실체로 착각하고 이끌려 다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 괴로움의. 원인은. 자신의. 그림자에. 있다.】
언젠가 시골에서 닭이 혼자서 싸움하는 걸 보았습니다. 닭의 날개짓이 굉장하고 닭볏을 내 세우고 고고한 것 같아도 사람하고는 게임이 안 됩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닭이 거울하고 싸울 것 같습니까? 예, 거울하고 싸웁니다. 거울하고 싸우다보면, ‘아, 이게 내 그림자구나’ 하고 빨리 느끼고 즉시 싸움을 멈춰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거울에 비친 어떤 닭이 목에 힘을 주고 부리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발을 들어서 탁 차고 들어가봅니다. 그런데 그 감각이 보통 실제 닭하고 싸우는 것과 같나요, 다른가요? 다르잖아요. 다르면 ‘아, 이거는 내 그림자가 거울에 비친 것이다’ 하고 깨달으면 더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즉시 더 이상 싸워야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내 그림자 하고 내가 싸웠으니 우습나요, 안 우습나요?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 닭은 깨닫지 못 하니까 또 계속해서 싸우게 됩니다. 사람은 거울 앞에 있다가 거울하고 몇 번 마주치면 금방 ‘이것이 거울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근데 닭은 한 시간을 싸워도 모릅니다. 자꾸 쪼다 보니까 부리에서 피가 나고 털이 뽑히고 엉망이 되어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단 말이에요.
거울 뒤로 돌아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나오면 또 나타납니다. 나타나니깐 또 싸워야 됩니다. 스스로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닭아! 그건 네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거야. 거울에 비친 것은 상대방의 또 다른 닭이 아니라 바로 네 자신이야. 그걸 깨닫고 알아야 해.’ 하고 설명을 해줄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닭의 어리석음을 보며 안타까워하듯이, 부처님도 우리 중생을 보며 얼마나 답답해하실까요. 부처님이 ‘아, 정말 어리석게도 이제껏 내가 내 그림자하고 싸웠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고 나서 보니까, 모든 중생들이 어리석게도 스스로 욕망겳壤?繭遮�그림을 그리고 사치라는 그림을 그리고 자만이라는 그림을 그리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청정한 성품을 잊고, 그림자에 이끌려 다니고 그 그림자의 포로가 되고 그 그림자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 여여한. 마음에. 머물면. 행복의. 문이. 열린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밝히셨습니다. ‘상(相)에 이끌리지 말고 속지 말아라. 상은 영원한 게 아니라, 거짓이야 거짓! 그 네 생각이 만든 허망한 상에 이끌려서 끊임없이 그 길로 간단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다. 모양은 언젠가 다 사라져서 허공으로 돌아가지만 맑고 여여한 부처님 마음만 영원한 것이다.’라고 부처님께서 얘기해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 욕망과 욕심을 실체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람이 욕망겳壤�빼놓으면 시체죠. 무슨 재미로 살아요.”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욕망과 욕심을 그리고 있어요. 지금이라도 지혜로운 사람은 ‘아, 정말 욕망과 욕심은 내 생각이 만든 고정된 관념의 틀이었구나. 그런 고정된 관념 속에 이끌리고 살아왔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부처님 안목으로 이 세상을 보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부처님 안목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차별없이 여여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보고 풀을 보고 또 흘러가는 물을 보고 날아가는 새를 보고 바위를 봅니다. 온갖 꽃들이 피어 있는 산을 보는데, 그 산을 보면서 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하고 싸우는 사람이 없어요. 자연을 보면 심술을 떨던 사람도 순수하고 착해져요. 그 자연은 다툼이 없어요. 그래서 부부 싸움을 많이 하는 사람도 산에 가서는 안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산에 가서 실컷 구경하고 집에 오면 또 전쟁이 시작되는 집이 있습니다.
산에 가서는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보기 때문에, 마음이 생각을 그치고 평온해지는 것입니다. 산에 들어가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풀벌레소리가 마음을 아주 아름답고 싱그럽게 이끌어주잖아요. 그런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싸우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산을 내려와 일상의 집으로 돌아오면, 미운 사람을 만난다거나 싫은 소리를 듣는 순간에 마음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과 듣는 귀, 생각을 차별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올바른 가치관에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살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청명한 가을하늘 같은 마음으로 여여하게 보고, 여여하게 듣고, 여여한 마음에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삶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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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 스님 _ 부산 여여선원 선원장. 1974년 범어사에서 벽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범어사 강원 대교과를 수료하였으며, 김천 청암사, 현풍 도성암, 쌍계사 금당선방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95년 부산의 재래시장 한복판에 여여선원을 개원하였으며, 2000년 부산불교회관을 건립하여 도심포교에 앞장서고 있다.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 회장, 금정구종합사회복지관 관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보현도량겫맨痔洋瑾�이사장, 대한불교교사대학 학장, 공동선실천 종교지도자협의회 공동대표 등을 맡아 포교 및 복지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