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요점은 있는 그대로 보아 놓아 버리기

세계의 선 지식들 10 스리랑카의 은둔 고승, 냐냐난다 스님

2007-11-04     관리자


“냐냐난다 스님이 계신 곳은 아름다운 정글의 바위를 파 만든 동굴 명상실이었다. 영락없이 그 곳에도 해골과 뼈들의 그림, 그리고 부처님의 고행상(苦行像) 사진만 있었다. 스님은 그 고행상처럼 바람이 불면 부서질 듯 여윈 모습이셨다.”
스리랑카 캘러니아 대학에서 팔리어 및 불교학을 전공하고 동 불교대학원을 졸업한 유운 스님은 냐냐난다 스님(Bhikkhu Nanananda)을 친견한 감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뼈가 파일 정도의 수행, 하루 한 끼의 식사, 어떤 초대도 거절하고 바위 동굴에서 수행에만 매진하는 스님의 구도심에 감동한 유운 스님은 『스리랑카 비구 냐냐난다 스님의 명문 선집』이란 작은 법보시 책자를 번역,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냐냐난다 스님은 대학에서 팔리어를 가르치는 명망
높은 교수였다. 어느 날 문득,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네주는 배(교학이란 방편)를 다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교직을 떠나 아란냐(한국의 무문관과 같은 전문 명상센터)로 들어가 1969년부터 숲 속에서 명상 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는 팔리어 교수였기에 원시 경전에 능통했으며, 그것을 실천적으로 수행했기에 그의 지혜는 크리스털처럼 투명했다. 교학을 통달하고 실참으로 들어간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경지였기에, 직관적 지혜에서 나온 그의 탁월한 안목은 세계적 명저인 『초기불교사상에서의 개념과 실재(Concept & Reality in early Buddhist thought)』와 『마음의 마술(The Magic of the Mind)』 등을 통해 빛을 발하고 있다.
‘파한카누와 은둔처(Pahankanuwa Hermitage)’라고 불리는 동굴에 거처하는 냐냐난다 스님은 묵언 정진하면서 외부 출입을 하지 않지만, 법을 전하는 일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억겁의 인연과 지혜의 빛에 끌려온 수행자들에게는 항상 “열린 마음(open mind)만 가지고 오라.”는 명상의 요점을 일러준다. 아울러 그의 법문은 인터넷 사이트인 ‘비욘드 더 넷(http://www.beyond
thenet.net)’ 등을 통해 법보시(法布施) 되고 있다. 은둔처에만 주석하는 스님에게는 인터넷이 세상을 향해 열린 유일한 창이자, 대중 설법장인 셈이다.

편견과 집착을 여읜 관찰의 힘을 키우라
냐냐난다 스님은 위빠사나-통찰명상의 목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things as really are)’ 볼 수 있는 관찰의 명확함[直觀知]을 유발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것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집착의 관찰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세상을 여실히 보지 못하는 것은 미묘한 집착과 편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또한 통찰명상의 ‘깨어있음’ 수행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객관적인 마음챙김이다.

“마치 바늘을 찾기 위해서는 이 현재의 순간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수행자는 순간순간, 완전히 깨어서 알아차리고 있어야만 한다. 깨어있음(sati)과 나란히 가고 있는, 이 완전한-알아차림(sampajanna)은 우리 경험의 주관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탐조등(探照燈)의 역할을 한다. 이로써 애착심과 증오심, 그리고 어리석음이 진정으로 우리의 경험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냐냐난다 스님의 명문 선집』 중에서)

스님은 ‘깨어있음’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수문장으로 서 있는 동안, 알아차림은 감각 대상들이 다가오는 경계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감각 대상들에 대한 정신적 기록은, 더 심오한 내적 통찰의 수준으로 인도하면서, 집착 없는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 여섯 감각기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을 깨어있음과 알아차림의 힘으로 따옴표 속에 넣어버릴 때, 평정을 얻은 수행자는 그것에 비켜서서, 단순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37가지 깨달음의 요소(37助道品)’ 중, 스님이 강조하는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다섯 가지 방법은 믿음, 기력(energy), 깨어있음(mindfulness), 마음집중(concentration), 지혜 등이다.
여기서 믿음과 지혜는 감정과 지성을 표현한다. 또 다른 한 쌍인 기력과 마음집중은 노력과 이완을 의미한다. 수행자가 평정심을 얻기 위해서는 이 각각의 두 쌍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저울의 눈금은 중도(中道)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이는 지나침이 없는 ‘마음 제어’의 역할을 하는 ‘깨어있음’이 저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수많은 번뇌들 때문에 수행자가 실상(實相)을 바로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통찰명상을 함으로써,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여여함(Such-ness)’을 꿰뚫어 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명상의 한 방법으로 스님은 ‘볼 때는 오직 봄만이, 들을 때는 오직 들음만이, 냄새맡을 때는 오직 냄새 맡음만이, 맛을 볼 때는 오직 맛봄만이, 접촉할 때는 오직 감촉만이, 생각 할 때는 오직 생각함만이’ 있도록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마치, 숭산 스님이 ‘오직 ~할 뿐’임을 강조한 법문과 유사한 맥락이다.
이러한 수행법 속에서, 감각 대상들은 단순히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사건들을 이해하게 만드는 수업의 대상들이 된다. 이러한 사건들이 이해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부수적인 것들일 뿐, 거기에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無我]을 깨닫게 된다. 그 모든 특정한 사건들은 그저 그러할 뿐, 별다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집착 없이 ‘놓아 버리기(Let-goism)’
이러한 인지(認知) 작용의 ‘신기루’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정신적 장애를 깨끗이 정화해야 한다. 즉 감각적 쾌락, 사악한 마음, 권태와 무기력, 불안정과 걱정, 의심 등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든 수준의 마음집중과 통찰명상의 기본이다. 마음이 이러한 장애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기억력, 깨어있음, 마음집중, 고요함, 그리고 통찰력이 저절로 다가온다. 즉 “청정한 마음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는 모든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는 선(禪)에서 본래면목의 작용을 상징할 때 쓰는 ‘마음 거울[心鏡]’, ‘옛 거울[古鏡]’, ‘여의주[如意珠]’ 등의 표현과 다름이 없다.
스님은 ‘모든 것이 변한다[諸行無常]’는 사실, ‘진리’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순리에 따라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그 모든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집착심이 안타까움과 고뇌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무집착의 정신으로 이 ‘놓아버리기(Let-goism, 放下着)’를 수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모든 것들은 자체의 본성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며, ‘모든 것이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一切唯心造]’임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이 우리의 무지와 갈망의 창조물이라는 자각이 들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의 상호 작용에 대한 통찰은, ‘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생각이고, ‘나는 ~이다’라고 하는 것은 오직 아만심일 뿐이라는 것, 오직 상상의 ‘나’를 ‘나는 ~이다’로 상상하는 것일 뿐이라는 진리를 절실히 느끼게 할 뿐이다.”(『냐냐난다 스님의 명문 선집』 중에서)

통찰명상을 비롯한 모든 수행은 결국, 자신을 이기고 열반의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스님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성스러운 8정도의 실천으로 지혜를 성취함과 더불어, 깨달음의 빛을 세상을 향한 자비심으로 회향할 것을 가르친다. “자비관 수행으로 이기적이고 인색하고 초라하며, 때로 보복에 불타고 있는 우리의 울타리(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모든 관계와 고정관념)들을 놓아버리라.”는 것이다. 열린 가슴으로 모든 존재를 사랑하면 방어도 공격도 없는 아름다운 축복을 경험할 것이라고 스님은 확신을 주고 있다.
오늘도 스님은 변함없이 어두운 동굴 안에서 정진 중이겠지만, 늘 태양처럼 빛나는 자비관의 메시지를 지구촌에 발산하고 있다. “모든 존재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행복하기를, 행복하기를, 행복하기를!” 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서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