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관(非我觀) 3

용타 스님의 생활 속의 수행이야기

2007-11-04     관리자

미리 말씀 올립니다만, 이 글 ‘비아관(非我觀) 3’을 읽으실 분은 앞선 2회의 비아관 12를 거듭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비아관(무아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가를 안내하겠습니다. 앞 호에 해공십조(解空十條)라는 이름으로 23개의 비아관을 수련장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일렀듯이 비아관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선 분석고공(分析故空, 析空觀) 관법으로 비아관 실습을 해보기로 합니다.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에 분석고공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당에 마차가 있습니다. 나선 비구가 왕에게 묻지요. “저것은 무엇입니까?” 왕은 “마차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나선 비구는 “저것은 마차가 아닙니다. 자, 보십시오.” 하면서 마차를 여러 개의 부품으로 나누어서 마당에 산재시켜놓고, “왕이시여, 마당에 있는 것이 마차입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왕은 “마차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나선 비구는 “이처럼 마차라고 부르던 것을 분해해보면 마차라고 할 만한 것이 없듯이, ‘사람’이나, ‘나선’, 또는 ‘나’라고 하는 것도 ‘지(地)-수(水)-화(火)-풍(風)-수(受)-상(想)-행(行)-식(識)’ 등으로 분석해서 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왕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나선 비구를 스승으로 모십니다.
절묘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몸은 지수화풍의 가합(假合: 잠깐 어우러진 것)이요, 마음 역시 수상행식의 가합에 불과한 것인데, 중생은 그것을 귀히 여기며 ‘나’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점점 더 욕구의 주체로 느껴갑니다. ‘나’, ‘나’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짓을 하면 할수록 아집이 강화되고 고통과 전쟁은 보다 치열해집니다. 다행히 중생이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나란 지수화풍수상행식에 불과해!’ 하고 관조하게 되면, 이렇게 관조하는 밀도가 높아지고 관조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기심의 주체로 느껴지던 자아감과 아집이 점점 사라지면서 가없는 해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아가 진정 무한 우주가 중중연기(重重緣起)하는 한 유기체라는 일체감(一體感: 한몸이 되는 느낌)을 느끼게 됩니다. ‘더 이상 자아를 위한 인생이 아닌 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위한 삶을 살리라’ 하는 보살 정신이 활구로 체감되어 옴으로써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니, 이 비아관은 참으로 부처와 보살을 낳는 모태인 것입니다.
거듭 언급합니다만, 안으로의 무수한 고통과 밖으로의 무수한 전쟁은 오직이리만큼 ‘나’, ‘나’ 하면서 만들어진 ‘아집(我執)’으로부터 나오는 바이니, 이 ‘아집’으로 벗어나기 위해 그 아(我)를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바르게 인식해보니 그 ‘아(我:나)’란 평소 애매하게 익어져 있는 ‘나’가 아니고 ‘지-수-화-풍-수-상-행-식’의 가합(假合)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에, ‘응, 나란 지-수-화-풍-수-상-행-식이로구나!’를 무수히 음미-반복-관행함으로써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미성숙한 자아의식에서 해탈하는 것입니다. 이 관행이 바로 분석고공의 원리를 활용한 비아관(무아관)입니다.
스스로를 ‘나’라 불러보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기적 주체’로서의 아집이 강화되는 것이지만, 그 ‘나’를 ‘지-수-화-풍-수-상-행-식’이라 생각하면 이기적 주체로 여겨지지 않는 다는 것이 절묘한 맥입니다. 이 맥을 붙들고 반복-반복 관행하는 것입니다. ‘산소+수소’라 생각하고 말할 때는 ‘물’의 개념이 떠오르지 않듯이 ‘지-수-화-풍-수-상-행-식’이라 생각하고 말할 때는 이기적인 주체로서의 ‘나’라는 느낌은 들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이나 말을 천만 번 했다면, 이상과 같은 비아관을 천만 번 해야 ‘나’라는 의식은 정화됩니다. 천만 번을 언제 다 하냐고요? 특별한 묘수가 없습니다. 이기심의 주체가 되는 자아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면 천만금을 들여서라도 해내겠다는 결심이 서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묘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깊은 삼매상태에서 비아관을 수행하게 되면, 적은 횟수의 관행으로도 자아의식으로부터 보다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석존의 보리수 아래서의 대각은 바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는 깊은 삼매 상태에서, 연기고공(緣起故空: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하다)의 이치를 단 한번 관조함으로써 완벽하게 자아로부터 해탈하신 것임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싯다르타 수행자께서 수정주의 접근법을 떠났다는 것은 수정(修定: 正定, 禪定)의 길을 버린 것이 아니고, 일단 지양하신 것이며, 대각 성취 후 전법을 하실 때에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지양통합하여, 정정(正定) 혹은 선정바라밀이라는 이름의, 불교 필수 수행법으로 정립하여 수행하게 하셨음.]
90일 한 결제 기간(90×10=900시간), ‘나’라고 하는 것을 ‘지-수-화-풍-수-상-행-식’으로 분석해서 관조하는 일을 정사유(正思惟: 팔정도의 제2)적으로 관행(觀行)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까? 수행에 있어서만은 석존불교를 깊게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___ 추신으로 한 말씀 올립니다. 무아(無我)가 진리이냐, 방편이냐에 대한 논의에 지지(支持)가 잘 안 되는 분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무도 이해가 됩니다. 지난 호의 ‘비아관 2’를 더 깊게 음미해보실 것을 권하며, 금강경의 ‘지아설법여벌유자(知我說法如筏喩者) 법상응사하황비법(法尙應捨何況非法)’을 정사유해보시면 좋을 것이요, 유교경(遺敎經)의 자등명(自燈明) 내지 법등명(法燈明)도 사유해보시면 좋을 것이며, 보다 긴 세월을 통해 방편의 의미를 궁구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