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스님] 전국비구니회 회장 명성 스님

“스스로 관세음보살이 되어 살라는 게 부처님 뜻”

2007-11-04     사기순

스님(세수 78세)을 생각하면 청도 운문사의 명물인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가 떠오른다. 우뚝한 기상도 그러려니와 그 푸근하고 넓은 자락이 스님과 꼭 닮았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라고 했던가. 그 동안 스님이 운문승가대학에서 배출한 1,600여 명의 비구니스님들을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덕화를 입었는지 모른다. 나 역시 그 중의 하나다. 너무 멀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해 늘 죄송했었다.

지난 2003년 가을, 스님이 전국비구니회장 소임을 맡으셨을 때 가까이에서 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런데 벌써 4년이 흘렀다. 재임 요청을 만류하고 퇴임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스님을 부랴부랴 찾아뵈었다.

수행과 일이 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 아침 일찍부터 인부들에게 일일이 화초 심는 방법을 일러주시는 스님의 모습을 뵈니 미소가 절로 인다. 밭이랑에 씨앗을 뿌리는 간격까지 정해주신다 해서 붙은 ‘밀리미터’라는 별명이 생각나서다. 스님은 요즘 비구니 회관 정화 작업, 화분 갈이, 이불장 정돈 등 허드렛일까지 일일이 챙기시느라 매우 바쁘시다.

“‘날아다니는 새도 뒤를 흐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어요. 뒷정리를 잘 해놓고 나가야 뒷사람이 일하기가 수월하지요. 수행과 일이 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理:평등한 진리의 몸)와 사(事:유위의 형상)가 둘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평생 『화엄경』의 이사무애(理事無碍: 평등한 理法과 차별 있는 事法이 걸림 없이 융합되다) 이사불이(理事不二: 理와 事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면서 살았다. 일머리와 공부머리가 따로 있지 않으니 일도 공부도 잘할 수 있었다. 불교학 중에서도 어렵기로 유명한 유식학(唯識學: 마음을 떠나서 어떠한 실재도 없다고 하는 학설)의 대가요, 붓글씨·원예 등 손대는 것마다 스승의 솜씨를 능가한다. 또한 찾아오는 이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게 하는 운문사 중창불사(佛事)는 물론이고, 지난 4년 동안 비구니회관을 반지르르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러한 에너지의 원천을 알 것 같다. 바로 이사무애법계에서 노닐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울러 즉사이진(卽事而眞),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면서 항상 진실하라고 하면서 생활 속의 수행을 역설하는 스님의 말씀은 운문승가대학의 가풍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인연 있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됨은 물론이다. 작년인가 설문조사에서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구니스님으로 뽑히셨는데, 이는 아주 오랫동안 유효할 것이다.

자주 하는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간다

“어릴 때부터 ‘부처님 같은 사람, 관세음보살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자주 했지요.”

자주 하는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간다고 했던가.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던 스님은 관세음보살이 되어서 살라는 게 부처님 뜻임을 자각하면서 23세에 입산하였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다. 스승 복도 많아 일곱 분의 스승[당대의 대강백이셨던 관응 스님(사집), 경봉 스님(동학사, 원각경), 운허 스님(능엄경), 만우 스님, 탄허 스님, 성능 스님(선암사)]을 모셨다. 성능 스님 회상에서 대교를 마치고 전강을 받았다. 출가 5년 만에 전강을 받고 비구니 교육에 임하였으니 어찌 이생만의 인연이겠는가.

“스님이 28세 때 조계사에서 큰스님(당시 종정이셨던 동산 큰스님을 위시해서 청담 스님, 효봉 스님 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법문하셨다는 얘기를 어머니(보광명 보살)께 전해 듣고, 법화산림 법회에 계속 동참하고 있는데 스님이야말로 한국불교의 희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진광혁(73세, 용인 거주)]

“스님을 따라다니면서 불에도 녹지 않는 불심덩어리가 자리 잡았고 불자로서 삶을 익혔지요. 어느 날 벌레가 제 어깨에 떨어진 일이 있었어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치자, ‘이미 떨어진 벌레인데 옆 사람까지 놀라게 만드느냐?’고 하시더군요. 며칠 뒤 장난기가 발동해서 스님께 벌레를 떨어뜨렸는데, 정말 무덤덤하신 겁니다. 그 뒤론 찍소리도 못하고 스님 말씀을 따랐지요.”[홍성숙(66세, 분당 거주)]

스님의 남다른 모습을 나열하자면 소설 책 몇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뱀을 만난 일화 한 가지, 어느 여름날 개울가에서 경전을 읽다가 뱀을 보았다. 징그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측은했다. ‘축생의 몸을 벗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을 위해 경전을 읽자, 그 자리에서 뱀이 죽었다. 우연의 일치로 뱀이 죽었는지, 뱀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원한 공덕으로 몸을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성이 지극하면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인연인가.

베풀면 다 이루어진다

1974년 동국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을 때 동국대 강의를 요청받았다. 그러나 비구니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운문사 강원으로 내려갔다. 운문승가대학을 250여 명이 수학하는 국내 최고 최대의 승가대학으로 발전시켰다. 50여 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전강 받은 제자도 여럿이다. 교육에 힘쓰는 한편 운문사 중창불사도 척척 이루었다. 사람들마다 지혜와 복덕을 두루 갖추신 스님이 계셨기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찬탄해마지 않는다. 비구니회관도 마찬가지다. 사실 4년 전 원로 스님(광우 스님, 진관 스님 등)들의 청원에 못 이겨 전국비구니회장 소임을 처음 맡았을 때 그 형편이 매우 어려웠었다.

“전 회장이신 광우 스님께서 천신만고 끝에 비구니회관을 지어놓으셨는데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 베갯잇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였습니다. 전국의 지회를 순회하며 조직을 강화했고, 보살님들[홍라희, 윤용숙, 박명혜, 정금자 등등]의 협조로 겨우 숨을 쉬었지요. 한마음선원 대행 스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한편 평소 연마한 실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전국비구니회관 기금마련 서예전을 열었다. 성황이었다. 작은 소품까지 다 팔렸다. 그때 3억2천만원의 기금이 큰 힘이 되었다. 비구니회관에 다양한 문화강좌(서예, 요가, 다도, 민화, 불화, 선재 스님의 사찰요리)를 열고, 각종 법회를 열어 법을 전하고, 비구니 스님 32분을 초청하여 법화산림을 개최하는 등 비구니회관을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 한편 2004년 7월 우리나라에서 제 8회 세계여성불교도대회를 개최하여 한국비구니계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알리기도 하였다.

“욕심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 큰 불사를 다 이루신 것 아니겠습니까? 청정하시니까 덕구름이 모여드는 것 같아요. 용돈을 드리면 모았다가 보시를 하십니다. 불사금, 대중공양, 유치원, 군부대, 장학금 등 스님만큼 복 많이 짓는 분도 없으실 겁니다.”[김형태(66세, 분당 거주)]

“옆에서 지켜보니 ‘그냥 생긴 것,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시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잘 쓰십니다.”[효탄 스님, 운문승가대학 강사]

운문사 처진 소나무보다 더 넉넉한 자락으로 중생을 보듬어주시는 스님께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쭈었다.

“경제는 지나갈 경(經) 건질 제(濟), 돈이 돌고 돌면서 구제하는 것입니다. 빌게이츠처럼 번 것만큼 사회에 환원하는 삶이어야 하지요. 대구 인터불고 사장님도 번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아주 열심인 분입니다. 종이조각에 집착하지 말고 베풀면서 살면 더 좋은 일이 생깁니다. 불자들은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하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익혀온 온갖 습관들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불자치고 대자유인을 꿈꾸지 않은 자 없을 것이다. 대자유인의 길은 바로 조고각하(照顧脚下), 순간순간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데 있음을 스님의 삶에서 배웠다. 지극한 행복감, 가을바람이 청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