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좋은 계절, 수행하기 좋은 계절

테마가 있는 사찰기행 가을을 여는 데이트, 춘천 오봉산 청평사(淸平寺)

2007-11-04     관리자


여름 내내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다. 장마철 대신 우기(雨期)라고 불러야 할 만큼 후덥지근한 날씨가 변덕을 부리며 계속됐다. 그래도 때가 되니 귀뚜라미 울고 가을바람이 선선하다. 어찌 이때를 그냥 놓치랴. 일상의 일탈을 꿈꾸며 춘천 청평사로 간다. 팔당대교를 건너 경춘국도를 따라 젊음을 한껏 배설했던, 추억 속의 지명들과 재회한다. 양수리, 새터,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젊은 날의 객기어린 장면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청평사로 가는 길은 1973년 소양강댐이 축조되면서 뱃길이 보편화되었다. 육로로도 닿을 수 있는데, 대중교통이 없으며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고 또 넘는 곡예운전을 감수해야 한다.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려면, 배표 뒷면에 인적사항을 적어야 한다. 순간 움찔해진다. ‘인생이란 이대로 표표히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이내 피식 웃음이 나온다. 평온한 소양호를 유유자적 가르며 고작 15분을 갈 뿐이다.

공주와 상사뱀의 애절한 설화 _
청평사는 고려 광종 4년(973년) 영현 스님이 백암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문종 22년(1068년) 이의가 중창하여 보현원이라 불렀으며, 그의 아들 이자현이 중수하여 문수원이라고 하였다. 청평사라는 이름은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이르러 보우 스님이 대대적인 중창을 하면서 붙여졌다.
배에서 내려 청평사로 가는 숲길은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그 중심에는 ‘공주와 상사뱀’의 애절한 설화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 중국에서 공주를 사랑하던 평민 청년이 왕에게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청년은 ‘상사뱀’으로 환생하여 공주의 몸을 감싸고는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영험있는 사찰을 순례하며 기도할 것을 권유하여, 이곳 청평사까지 오게 되었다.
밤이 늦어 동굴에서 노숙하고, 다음날 아침 뱀에게 절에 가서 밥을 얻어올 테니 잠시 몸에서 내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뱀이 웬일로 순순히 공주의 말을 들어주자, 계곡에서 목욕재계하고 청평사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공주를 기다리다 못한 뱀은 회전문을 통해 절에 들어가다가,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벼락과 함께 폭우가 쏟아져 물에 떠내려가 죽고 말았다.
공주는 폭포에 둥둥 떠 있는 뱀을 보니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정성껏 묻어주었다. 그리고 청평사에 머물며 부처님 은공에 감사드리는 마음을 담아 삼층석탑을 세웠다. 이후 공주가 노숙했던 동굴은 ‘공주굴’, 목욕을 했던 웅덩이는 ‘공주탕’, 삼층석탑은 ‘공주탑’이라 불리게 되었다.
뱀이 폭우에 떠내려가다 걸렸다는 구성폭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오봉산이 물 위에 그림자처럼 떠오르는 영지(影池)가 나온다. 이 영지는 세도가였던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오봉산에 들어와 청평사 일대에 조성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정원(高麗庭園: 문수원)의 잔영이다.

청평사에 서려있는 고찰의 향기 _
영지를 뒤로하면 얼마 안 가 청평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키가 훤칠한 두 그루 잣나무 사이로, 우뚝 솟은 오봉산을 병풍 삼아 청평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당을 가로지르면 청평사를 대표하는 회전문(廻轉門, 보물 제164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선다.
회전문을 빙빙 돌아가며 회전하는 문으로 연상하는 이도 있겠지만, 여기서 ‘회전’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로, 중생들에게 윤회의 이치를 깨우치기 위해 지어진 문이다. 한편으론 ‘공주와 상사뱀’ 설화에서 보듯이, 뱀이 공주를 찾아 절 안으로 들어갔다가 벼락을 맞고 폭우에 밀려 이 문을 돌아나갔다 하여, 회전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평사에는 여느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회전문을 들어서면 긴 회랑(回廊)이 이어져 있고, 대웅전 앞까지 평평한 돌을 깔아놓은 보도, 원형 구멍이 뚫린 조선시대의 배수구 덮개돌, 태극문양의 돌계단 등은 모두 궁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이는 아마도 보우 스님이 사찰을 중창할 때 문정왕후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후 왕실의 원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현재의 대웅전, 관음전, 나한전, 극락보전, 산신각 등은 근래에 신축된 것으로, 회전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찰의 향기가 서려있는 것은 아마도 극락보전 옆의 주목(朱木)이 800년 세월 동안 끊임없이 푸른 잎을 피워냈기 때문일 것이다. 주목 앞에는 참배객들이 엄청나게 많은 돌탑을 쌓아놓고 있어, 주목에 대한 예를 표하고 있다.

윤회하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_

청평사 앞을 흐르는 계곡의 이름은 ‘선동(仙洞: 신선이 사는 골짜기)계곡’이다. 그만큼 맑고 깊다. 햇빛이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며 신비로운 서늘함마저 감돌게 한다. 송이버섯이 많다더니 어디선가 버섯향이 스물스물 올라오기도 한다.
회전문을 돌아나오며 다시 한번 윤회를 되새겨본다. 대자유를 이루지 못하고 중생의 삶을 윤회하는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집착, 분별, 번뇌, 욕망, 성냄, 게으름, 두려움, 어리석음…. 떨쳐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듯, 가만히 앉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꿈꿀 수만은 없는 일이다. 매 순간 거짓 없는 자신의 참모습을 성찰하며,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의 마음을 증장시켜야 할 것이다.
일상의 수행터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배에 오른다. 앞 의자 덮개에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는 낙서들이 빼곡하다. 눈을 창 밖에 던져두니 잔잔한 청평호에 햇살이 잘게 부서지며 반짝인다.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다. 수행하기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