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전의 태아관이 주는 교훈

*불교와 여성

2007-11-04     관리자

     불전의 태아관이 주는 교훈


                                              백 경 임 (白庚壬)
                                                  ‧ 1950년 대구 출생 
                                                  ‧ 이화여대 가정관리학 전공후, 동국대 대학원에서 아동학전공
                                                  ‧ 서울 명성여중 교사 역임
                                                  ‧ 현재 동국대 전임강사.

두 차례에 걸쳐서 불전의 태아 발달과정을 살펴보고 미흡하나마 현대 아동학의 안목으로 조명해 보았었다.
이번에는 이러한 불교의 태아관에서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재인식해야 할 내용을 다루어 보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수용되어야 할 좋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먼저 불전의 태아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태아를 이미 한 인간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의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과 윤리사상에 입각한 종교적인 해석은 접어 두더라도 태아를 한 인간으로 다룬다는 검은 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임신중절에 대한 불교에서의 입장은 분명해졌다. 「사분율」에도 낙태를 살생계(殺生戒)로 엄격히 금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불교인은 스스로 낙태를 하거나, 남에게 낙태를 시키거나, 남에게 낙태를 해주는 일을 금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아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일반적으로 출생하면서부터 한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데에도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합법적이기 때문이기도 한지만 특히 임신 초기엔 생명체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 없니 살생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태아의 신체 각 부분의 95%가 임부가 스스로 임신했는지 자각 증세가 아직 분명치 않은 임신 8주 사이에 형성된다는 것을 상기할 일이다.
수태하면서부터 이미 한 인간으로 다루는 불전의 사상은 우리나라 전통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태어나면서 한 살로 인정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아동들에게 전통적 나이 계산법으로 본인의 나이를 인식시켰을 때, 보다 높은 목표수준 때문에 더 큰 성취를 한다는 연구가 있다. 반드시 전통적인 나이 계산법을 따르자는 것 보다 선의들의 지혜는 인정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태교의 중요성에 대해 재인식을 하여야 한다.
앞에서 다룬대로 불전에서 태아의 정신활동을 상식 이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또 현대과학에선 태아가 모체를 통해서 받는 영향이 상당히 커서 인격‧ 성격‧ 지력‧ 신체발육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 영향이 큰 만큼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는 태교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불교의 영향 때문인지 태교를 중요시 하였으나, 최근 연구(홍혜경 : 한국여성의 태교인식도에 관한 연구 : 1980)에 의하면 학력이 올라갈수록, 도시로 갈수록 태교의 필요성을 더 느끼며 그 중에서도 정서적인 안정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일부에선 미신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물론 전통적인 태교의 내용 중에는 닭고기를 먹으면 닭살의 아기를 낳는다는 등 미신적인 내용도 있지만, 모체의 마음가짐에 대한 내용은 매우 발달되어 있다. 태교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그 내용의 과학성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될 것이다.
흔히 태아가 받는 영향의 지대함을 설명하면 가임여성들은 과민하게 반응하여 상당한 두려움을 갖는 경우도 없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토마스‧ 바니의 다음 내용을 염두에 두면 태교의 가장 핵심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어머니가 직면하고 있는 스트레스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태아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 특히 애정이 그 포인트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태아가 어머니의 애정을 감지한다면 자신의 주위에 일종의 방호벽이 생겨서 외부의 스트레스에서 받는 충격이 완화되거나 경우에 따라서 중화된다는 것이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체일지라도 태아를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무의식까지 확실하다면 위험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전시(戰時)의 혼란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전쟁을 겪은 유아와 위험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어머니와 결별한 유아를 성장 후 조사하였을 때 전쟁을 어머니와 함께 겪은 유아 쪽이 정서적으로 안정되더라는 연구와 맥락을 같이하는 내용이다. 아이들의 양식은 음식이 아니라 애정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볼 때 아버지의 태교를 연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임신과 육아가 부모의 공동책임이기도 하지만 태아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은 아버지의 영향을 상당히 받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태교는 여자만의 일이 아님을 알아 둘 일이다.
한편 태아가 무감각한 살덩어리가 아니라 아주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산 생명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지금까지의 출산법에 대한 반성도 일기 시작한다. 그 자신 남자임에도 물구하고 신생아 9천명을 지켜 본 불란서 산부인과 의사 르봐이예(Leboyer) 박사는 아기의 입장에서 분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그는 저서 「폭력없는 탄생」에서 아기의 감정과 인권 존중하는 뜻에서 따뜻하고 부드럽게 받아내자고 설득한다. 그런데 그 근본적인 취지 뿐 아니라 내용 중의 일부가 불전의 가르침과 일치하여 흥미롭다.
아기들이 어둡고 포근한 태내에서 갑자기 수술대의 강한 불빛이 내리쬐는 시끄러운 세상으로 나왔을 때, 의사가 거꾸로 들고 등을 내려 칠 때, 마치 날벼락에 감전된 것처럼 놀라고 현기증을 느낀다고 한다. 또 아기를 차고 딱딱한 쇠붙이로 만든 체중계 위에 올려 놓거나, 타올 위에 눕혀 놓는 것은 마치 가시방석에 눕히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불전에서는 생‧ 노‧ 병‧ 사의 인생의 4가지 큰 고통 가운데 「태어남의 고통」을 그 하나로 꼽고 있다.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에 의하면 이 「생고(生苦)」를 협소한 산도(産道)를 경과하는 고통과 출산 후 처음 접하는 바깥세상의 공기‧ 조산부의 손‧ 뜨거운 목욕물‧ 거친 물질에 접촉되는 산착(産着)의 고통으로 나누고 있는 점과 상당히 일치한다. 경전에서는 인생의 초기에 충격적인 생고를 겪으면서 태어나기 때문에 전생(前生)에 있었던 기억을 모두 망각한다고 한다. 르봐이예 박사는 이 산착(産着)을 폭력이라고 말한다.
『어둡고 따뜻한 방에서 조용히 친절하게 아기를 받아야 하며, 탯줄은 즉시 자르지 말고 그와 생명을 같이했던 엄마 배 위에 5~6분 엎어 놓으므로서 귀에 익은 엄마의 심장 고동소리를 듣게 하다가 탯줄의 박동이 그친 뒤에 자르는게 좋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 ‧ ‧ ‧ 탯줄을 자른 뒤, 물〈羊水〉에서 나온 아기를 다시 체온과 같은 온도의 물로 도려 보내 줌으로써 외기(外氣)에 시달리던 아기의 몸을 공포에서 풀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불전에서는 출산에 있어서 선업을 쌓은 아기는 목욕물〈浴池〉에 넣어져서 물 가운데에서 즐겁게 놀고 좋은 향이 나는 높은 곳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느껴지나, 악업이 쌓인 아기는 산에서 떨어져 개천이나 더러운 곳에 떨어지거나 혹은 지옥이나 광야 또는 칼창 가운데 있는 것같이 느껴져 슬프다고 했다. 인생의 처음을 이렇게 불행을 겪으며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르봐이예 박사에 의해 포근하게 태어난 아기는 출생 당일에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웃으면서 태어난 아기는 당연히 생을 긍정적으로 보아 밝은 삶을 누리며 선업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의사와 산모 그리고 그 가족들이 아기를 한 인격으로 보고 세심한 배려를 한다면 우리사회가 훨씬 긍정적이고 밝아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