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 그림 그리는 사람 최홍원

2007-11-04     관리자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한적한 도시 원주.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가르며 최홍원(66세) 선생을 찾았다. 원주여고에서 5분 남짓한 곳에 그의 작업실이 있었다.
20평쯤 되어보일까. 탁 트인 하얀 벽면에는 사면 가득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칸칸이 그림이 옆으로 끼워져 있었다. 어림잡아 300여 작품은 넘을 듯 싶다. 천여 점이 넘는 작품 중 일부만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이젤 위에는 가을의 깊은 정취를 머금은 서낭당 그림이 얹혀 있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여느 전시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감동과 신비로운 생명력이 느껴진다.
평북 정주가 고향인 최홍원 선생은 오산중학교와 평양 국립 미술학교(김일성대학 1기)를 졸업하고 월남한 이래 강원도에 살며 40년 동안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냈다. 그가 그림을 그린 것은 올해 48년째가 된다. 이미 중학교 시절 우리나라에는 미처 소개되지 않은 초현실주의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프로이드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림 그리는 것과 클래식 음악 듣는 것, 그리고 독서는 그의 생활 그 자체다.
이른 새벽 4시가 되면 일어나 삼귀의, 천수경,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부처님께 예불을 하고 잠자기 전에 금강경을 암송한다. 부인이 하는 대로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12년 전 제가 춘천고등학교에 있을 때였습니다. 문득 동양 사람으로서 불보살님의 얼굴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우연찮게도 불교신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봉선사에서 통신강의로 ‘불교전문대학강좌’가 열린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연락을 드렸더니 고등학교 선생이니 사교과에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스님들 틈에 재가불자는 저 혼자뿐이었어요. 수능엄경을 공부하고 금강경오가해 · 기신론 · 원각경 · 대승입능가경 · 대지도론 · 화엄경 · 묘법연화경 · 육조단경 등을 공부하는 데 4년이 걸렸어요. 여름방학 동안에는 3박 4일씩 봉선사에서 강좌를 듣기도 했어요. 그리고 공부하다가 막히면 편지로 월운 스님께 직접 여쭙기도 하고요. 그 이후로 금강경은 매일 자기 전 한 번씩 3년 쯤 읽다보니 외워지더군요.
그는 금강경을 암송하는 동안 일체 잡념이 사라지고 많은 에너지와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금강경의 말씀대로라면 모든 상(相)을 버리라고 하였거늘 그림을 그린다는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하지만 그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50호 되는 화면 8장에 금강경 말씀 32분을 그림으로 옮겨 보기도 하고, 자신이 공부한 화엄 십지, 천수경, 반야심경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웬만한 불보살상은 안 그려 본 것이 없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불교 주제 그림만도 200여 점이 넘는다.
500 나한도는 두 번에 걸쳐 그렸다. 한 번은 50호에 56매로 500분의 나한을 그렸다. 그런데 그 수가 너무 많아 웬만한 벽면에 다 걸 수가 없었다. 그래 최근에는 화폭 하나에 100분 씩 다섯장에 그렸다.
“500 나한도는 김정희 선생이 중국 천연사에서 가져 왔다는 석판화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한 분 한 분의 모습을 두 번 노트에 베끼고 그 명칭을 써가며 연구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중 7 ~8분이 여자라는 것입니다. 옷은 대부분 인도 옷이나 중국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우리 옷으로 그렸어요. 얼굴 모습은 가능한 원모습대로 살렸지요.
전국의 사찰 가운데 나한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찰은 안 가본 곳이 없지요. 안타까운 것은 최근 조성된 나한님은 꼭 마네킹 인형 같은 느낌을 줘요. 천편일률적이기도 하고요. 자료에 의하면 500 나한을 조성하려면 사마타 경지에 들어가서야 가능하다고 하는데 말이지요.“
최홍원 선생의 작품 중에는 불영사 응진각 16나한을 그대로 옮겨 그린 작품이 있는가 하면 첼로를 켜고 있는 달마상도 있다. 마치 슈베르트 곡을 연주하는 듯한 모습이다. 때로는 열 개의 발가락이 달마의 얼굴로 화현한 것 같은 그림도 있다.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을 그대로 현현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그것을 초월하기도 한다.
“최홍원의 작품을 보며 새삼 영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을 보면 전적으로 영감에 의존하고 있다는 심증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감의 소산이 아니고서야 그처럼 다양한 조형적인 서술이 가능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는 이제까지의 미술사의 표현양식 및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 자유를 방법론으로 삼고 있다.”
미술 평론가 신항섭 씨의 말이다.
원주여고 재직시 제자였던 이영혜(잡지 · 출판 디자인 하우스 대표) 씨는 최홍원 선생을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의 분위기나 선생님 성품으로 그림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혹은 팔아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 속 끝까지 뻗어나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선생님 예술 세계는 굉장히 깊고 엄청나게 즐기셨죠. 그리는 데 대한 끝없는 열정, 어디에도 야합하지 않고 고독한 즐거움을 누리신 분입니다.”
올 5월 서울에서 가진 개인전은 그의 제자들이 마련한 전시회였다. 실로 30년 만에 갖는 작품전이었다.
전시해야겠다는 생각, 팔아야겠다는 생각없이 그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왔다.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경전 염송 중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다. 그는 여지껏 밑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다. 풍경화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자리에서 그 즉시에 그린다. 사진을 찍거나 스케치를 따로 하지 않는다. 특히 겨울에 많은 작품을 하게 된다고 한다.
새(봉황새)와 불화를 많이 그렸던 최홍원 선생은 요즈음은 서낭당을 주로 그린다. 전국 산간벽지 60여 곳을 찾아다니며 그렸다.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갈 때면 거의 아내하고 함께 간다. 아내는 옆에 앉아 수채화를 그리고 너무 추운 날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차 안에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한다고 한다. “할망구와 함께 그림 그리러 다닌다.”는 그의 이야기는 정겹기도 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국의 많은 사찰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장사꾼처럼 앉아서 시주하라는 절은 많지만 부처님 말씀 한 구절 알려주거나 나누어주는 절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반야심경 한 장이라도 찍어서 나누어줬으면 좋겠어요. 불자라면 당연히 포교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심지어는 단청더럽혀진다고 향을 꽂지 말라는 절도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서낭당 같았으면 좋겠어요. 주차비 입장료 받는 법 없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서 좋아요.”
오방색을 주로 쓰는 그의 그림은 우리의 정서와 잘 닮아있으며 섬세하면서도 부드럽다. 그러면서도 신령스런 생명감이 깃들어 있다. 질감 좋은 붓과 그림물감(유화물감의 시원인 네덜란드 생산품), 그리고 오일은 최고의 것으로 쓴다. 그래야만 붓자국이 나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천 분의 부처님을 그리고 싶어 그려 보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333분의 부처님을 그리고 나니 더 이상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500나한 그릴 때 그러하듯 이 역시 사마타 경지에 들어가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마침 3 ~4전에 불영사에서 인연 맺었던 법진 스님이 󰡔만불명호경(萬佛名號經)󰡕을 보내주셔서 열심히 보고 있다.
불교계의 그림 인연이래야 월운 스님과의 인연으로 봉선사 청풍루에 자신이 그린 후불탱화를 모신 것과, 춘천 고등학교 재직시 제자였던 박찬수 씨가 관장으로 있는 목아박물관에 네 점의 작품이 소개된 것이 전부다.
올 8월 행성여고를 정년 퇴임하고 이젠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최홍원 선생은 하루에 거의 한 작품씩의 그림을 그린다. 66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시력이 좋고, 아직도 건강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 자체가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울 수가 없다고 한다.
최홍원 선생의 작업실을 나오며 아, 이 분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많은 작품들을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 보며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최홍원(崔洪源)
* 1929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 오산 중학교와 평양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 1953년 전쟁화 개인전을 가졌으며, 1964년, 65년 두 차례에 걸쳐 POP ART 개인전을 가졌다.
* 강원도전 현대미술제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과 미술협회 강원도 지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94년 5월 서울에서 30년만에 개인전을 가졌고, 8월에 행성여고를 정년퇴임한 후 개인작업실에서 작업중인 우리 시대 감추어진 보물 같은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