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적 논리와 큰 깨달음

불교와 현대과학

2007-11-03     관리자

인도는 옛부터 수학이 발달한 나라였다. 특히 수(數)에 관한 지식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그들은 사색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같다. 불경에도 간간이 수학 나오고 실제 수학자의 활약상이 나오는 것도 인도인의 이러한 문화적 영향 때문인 것이다.
『중아함경(中阿含經)』의 「산수목건련경(算數目建蓮經)」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불타가 고사라국의 서울인 사위성(舍衛成)외곽에 위치한 동원정사(東圓精舍)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그 근처에는 여러 개의 정사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기원정사(祇園精舍)와 동원정사가 잘 알려져 있었다. 불타가 이곳에서 머물러 있는 동안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서 지도를 받기도 했으며 때로는 엉뚱한 질문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일부러 논쟁을 걸어오는 사람드 있었다.
어느날 한 수학자가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목건련이라고 했다. 그는 불교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인간의 인식능력에 관하여 깊은 관심이 있엇다. 처음으로불타를 찾아왔지만 수학자 답게 생각이 깊었다. 불타와 첫인사가 끝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곳 정사를 찾아오는 데에는 꼭 지나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또 내가 전공하고 있는 수학에 관해서도 말한다면 이것 역시 배우는 길이 있으며 순서에 따라 학습을 합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이 가르치는 길에도 역시 이와 같이 밟아야만 하는 길이 있는 것입니까?”
유한(수학)의 논리와 무한(종교)의 논리가 접목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짖궂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불타가 대답하기를,
“친구여, 내가 말하는 길에 있어서도 역시 수학의 역우와 마찬가지로 밟아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곧 지나가야 할 순서이지요. 가령 노련한 노련사는 처음 말을 훈련시킬 때에 우선 말의 머리를 반듯하게 세우는 훈련부터 시키고 이어서 차례로 훈련을 시킵니다. 나 역시 처음에 사람을 대할 때는 순서에 따라 설법을 하고 마침내 그가 대오(大悟)를 얻어 무상의 경지에 이르도록 합니다.”
유한의 단계를 밟고 드디어 무한(무상)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불타는 배우고 행하여야 할 길을 차례대로 설명했다. 그 내용은 자상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러자 수학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시다면,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지도를 받은 당신의 제자들은 모두가 대오를 얻어 무상(無上)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dklT는 것일까요?”
그의 질문 내용은 유한의 단계에서 어떻게 무한에 비약할 수 있느냐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친구여, 안타깝게도 그러한 경지까지도 못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방금 들은 바로는 틀림없이 대오(大悟)를 얻어 무상의 경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당신의 그것을 지도하십시다. 그럼에도 도달할 수 있는 자와 도달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니 모순인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듣고자 합니다.”
무한의 목표를 유한의 수단으로 갈 수 잇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는 그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거꾸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불타는 주로 직접으로 대답을 하지 않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역으로 다시 질문을 던져 상대가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불타는 이 수학자에게도 그 방법을 썼다. 발타의 반대심문은 항상 훌륭하여 분답법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가령 여기에 한 사람이 있어 당신에게 왕사성(王舍成)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합시다. 틀림없이 당신은 친절하고 자상하게 그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rm 사람은 당신이 이른 대로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는 어김없이 왕사성에 도달할 수 잇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쩌다 잘못 길을 걸어 엉뚱한 곳에서 헤맬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존이시여,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요, 왕사성은 틀림없이 있으며 그곳에 도달하는 길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 길을 똑바로 가르쳐 주지만 똑바로 그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존이시여, 그럴 경우 나는 길만 가르칠 뿐이며, 그 이상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친구여, 틀림없이 그럴 것이요. 대오를 하여 얻은 무상의 경지는 틀림없이 있습니다. 나는 그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오. 그러나 나의 제자 중에는 그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소. 나는 오직 그 길만을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이 이야기의 내용은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수학적인 이해와 불교적 대오에의 길이 그 시작에선 같을 수도 있다는 점이고, 둘째로는 불타의 제자에 대한 역할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잇기 때문이다. 다른 수많은 불경의 내용이 모두 비유로써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여기서도 불교적인 대오의 경지에 다다르는 길이 수학적인 인식의 길로 비유가 되어 있다.
수학의 명제는 그것이 아무리 난해고 고도로 세련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한 치의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 수가 없다. 마치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처음의 가정(공리)에서 출발하여 그동안 고안된 여러 결과를 원용하면서 한 발자국씩 올라간다. 올라가는 방법은 오직 수학적 논리이며 도중에서 나라아가는 일이란 없다.
때문에 이론상으로만 생각한다면, 한 발자국씩 옮길 수 있는 사람이면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수학의 논리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최고 수준의 수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산이 높아지면 산소가 부족해지고 암벽을 오르는 것도 단순히 발로 옮기는 일이 아니듯이 수준이 높은 수학은 지나치게 세련된 논리를 이용하기에 두뇌가 그것을 못 따르는 경우도 생긴다. 아무리 높은 산일지라도 공중에 떠도는 봉우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에 도달하려면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 이다.
불교적인 무상(無上)의 경지, 즉 대오(大悟), 해탈의 경지는 논리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 수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처음에는 논리에 따라야 한다. 불교적인 사유 방법인 ‘연기(緣起)의 이(理)’를 전개하면서도 한 치의 논리가 흩어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서 달을 보았다면 그 이상 손가락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표현이기도하다. 달만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학에 없는 비약이 있는 것이다. 이는 수학의 경우보다도 훨씬 강한 의지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논리(이성)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불타는 ‘자등명(自燈明, 스스로의 이성을 믿어라)’의 말씀도 하셨고, 이 수학자와의 대화에서처럼 대오의 경지가 수학적 인식(논리적인 것)의 비유로서 설명되기도 한다.
수학의 경우에도 인식으로 향한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하는데, 하물며 대오의 경지는 거듭되는 논리 전개의 끝에 더욱더 강한 의지의 힘으로 비약하는 단계(大悟)가 있다. 때문에 많은 제자 가운데서도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불타는 우리 중생에게 전능의 구제자는 아니다. 절대자라고 기적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를 선도하는 스승은 선지식(善知識)인 것이다. “나는 오직 길만을 가르치는 사람이오.” 라는 소박한 말씀 속에 불타는 진면목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