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임

빛의 샘․나의 수행과 인연

2007-11-03     관리자

얼마전 석남사와 운문사를 다녀왔다.
석남사는 나의 삭발본사이며 중노릇을 배운 곳이다. 운문사는 나 자신 스스로가 결정한 수행적 사상이 정립된 곳이라 늘 풋풋한 그리움과 추억들이 산적해 있는 곳이다. 그래서 가끔은 이곳들을 찾아가서 그 당당했던 모습들을 재현하고 싶을 대가 더러 있다.
봄부터 한번 다녀와야지 하면서도 그리 쉽게 다녀와지지 않았다. 아직 그곳에는 나를 기억해 주고 정담을 나눌 수 있는 낮익은 스님들이 머물고 있는데도 망설여지고 낯설은 곳처럼 느껴지는 기분은 무얼까.
철저한 규칙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지 않고 홀가분함에 물들여져 자유분망하게 사는 것을 더 선호하는 데서 오는 나의 인습적인 두려움, 이것은 대중이라는 커다란 질서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큰 마음을 먹고 다녀 왔다. 혼자 자기 길을 가겠다는 아희도 만날 겸 또 학장 스님의 덕담도 듣고 싶기도 해서 겸사겸사해서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잊고 사라온 자신만만했던 그 용기들을 다시금 불러 일으켜 힘을 얻고 싶기도 했다. 그때처럼 순수하지 자신만만하지도 못하는 내 생활의 파편들이 많이도 위축되어 가고 있음을 점검할 수가 있었다.
혼자 삶이 누구 눈치보고 간섭받지 않는 홀가분함도 있지만 자신을 연마하는데는 많은 게으름의 함정들이 버티고 있음을 또 발견할 수가 있었다.
수행에 있어서 편안하고 홀가분함들은 결코 좋은 것만이 아니었다. 많이 모여 살다보니 늘 시비가 끊어지지 않았던 대중살림이었지만 그 시비들이 때론 큰 힘이 되기도 했던 그때의 일들을 마냥 그리워하면서도 더불어 경책하고 묻혀 살지 못하는 나는 내가 정해 놓은 그 질서 위로 걷는 것이 편안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의하면 수행이란 행실을 닦아가는 것, 즉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수행이란 탐․진․치 삼독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보고 이러헌 것들을 소멸시켜 걸림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삼독을 없애는 방법으로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아 가는 것이다.
계율은 바로 일상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자발적인 도덕규범이며 자기 질서이다. 자기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질서들을 지키지 못할 때는 아무리 뛰어난 선지식의 가르침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초발자에게 더 강하게 내려지고 다듬어 갈 수 있도록 정해놓은 것이 질서를 통한 자기 통찰일 것이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번뇌망상에 의해 자제력을 잃고 혼돈의 연속으로 마음 집중이 되지 않으며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땅 위에 건축물을 세우고자 할 때 기초 공사가 튼튼하지 않을 경우 금방 벽면에 금이 가서 안정감이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쉽게 무너져 버리는 부실 공사의 현장을 목격할 수가 있다.
수행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잘 다져진 계율 위에 한걸음 한걸음 발을 놓는다면 그 어떠한 물질적 유혹이나 나뿐 업에도 크게 동요되지 않는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