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보살의 삶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조각가 한기늠

2007-11-03     관리자

아름다운 보살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조각가 한기늠 씨(43세, 이태리 국립미술대학 유학 중), 그가 한국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귀국했다.
그와의 처음 연인은 불광지를 통해서다. 불광 해외 구독자이기도 한 그는 이태리에서의 소식을 간간이편지로 보내오기도 했다.
“까라라에서 피에트라산타로 이사오고난 뒤부터 제 생활은 세계적인 조각들과의 만남과 신앙생활로 퍽 안정된 생활입니다. 아침 일찍 멀리서 들려오는 새벽 종 소리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아침예불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요즈음의 저의 생활은 수행자의길로 걸어가는 느낌입니다. 가끔은 이곳 생활이 한국의 설악산이나 오대산에서 수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하지요. 알프스 산맥을 이은 높고 낮은 산에는 사계절 이름모를 예쁜 야생화들과 산새들의 지저귐에 이곳 사람들도 어른인지 아이들인지 모르게 낙천적인 모습이 아름다워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성공 스님의 독경 천수경과 반야심경, 고왕경, 관세음보살 보문품, 법성게를 들으며 예불을 드린다. 그리고 108배를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이렇게 매일 예불을 올리기 지작한 것은 신심 깊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된다. 학창시절에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결혼을 해서는 시집이 천주교 집안인지라 성당에 다녔다. 그러나 절실하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5년 전 어는날 친정 어머니는 “나는 너를 믿는다.”하시며 100만원을 맡기셨다. 그리고 그 후 한 달 뒤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두셨던 어머니가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그 일을 당부하셨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9재를 지내던 6재 기도 중 그는 은빛 넓은 광장에 펼쳐지는 극락세계를 보았다. 부처님이 나투시고 관세음보살님이 나투시고 어머니가 하얀 명주한복을 입으시고 극락세계로 가시는 모습이었다. 그 때 이후 그는 형상 이전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확인하고 하루도 기도를 걸르지 않았다.
“처음 유학을 가서 살던 까라라에서 제가 지금 살고 있는 피에트르 산타로 이사를 가면서 그 곳 동네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전생에 제가 살았던 곳 같은 생각과 함께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어요. 마치 극락같기도 하고요. 첩첩산중에 있긴 하지만 집 앞으로 조그만 개울물이 흐르고 예쁜 꽃드링 피어있고…. 집 이름도 극락암이라고 붙였지요.”
까라라에 있는 학교와 브론즈 공장과 대리석 작업장을 오가며 작업을 하는 그는 매일 예불과 108배를 하는 동안 연상되는 구상들을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예불 속에 떠오른 모습들을 그대로 대리석으로 혹은 브론즈로 형상화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 생각되는 대로 작품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그의 자화상이 된다. 모두가 구도자의 모습이다.
때로는 스님의모습으로, 때로는 보살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그러나 그 모습 하나하나가 그의 모습과 닮아 있다. 차분하게 앉은 채 선정에 든 구도자의 모습, 그 모습이다.
달마 스님이 혜가 스님에게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어 끊어 버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임을 없애라.”고 하신 말씀을 자신의 생활 좌우명으로 삼듯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섬세하게 그이 작품은 안정되어 있다.
한기늠 씨가 조각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대학을 들어간 것은 서른 일곱의 늦은 나이었다. 입시를 치르러 대학문을 들어서려는데 수위 아저씨가 학부모는 들어올 수 없다며 가로막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을 정도의 나이었다.
원래는 꽃을 연구한 ‘꽃연구가’로 유명했던 그가 뎃상을 공부하고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꽃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뎃상을 공부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어느 대학교수의 충고에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산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미술학원을 다니며 뎃상을 공부하면서 입시학원에 다녔다. 그러면서 그의 관심은 자연 조형예술의 한 분야인 조각으로 옮겨졌다. 무언가 더욱 확실하고 견고한 조형물을 찾아나선 것이다. 3년 간의 입시 준비 끝에 그는 부산여대 미술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인 ‘90년 그의 나이 마흔에 이태리 유학길을 택했다. 새로운 기법과 새로운 각도의 시선으로 작품을 해보고 싶었다.
“내년에 학교를 졸업하면 영국으로 가 공부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공부가 끝나면 프랑스에서도 작품활동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제 유학생활은 15년이 걸릴 거예요. 그후엔 경주 근처 산세가 좋은 곳에 조그만 법당 하나를 짓고 부모없는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불교조각공원을 만들고 싶어요. 제 나이 쉰 다섯이나 여섯쯤에는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한기늠 씨,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루며 살아왔다. 서른이 넘어서는 세계를 일주하리라는 생각도,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라도 꼭 대학에 가리라는 생각도 그대로 이루었다.
이태리 유학도 해야한다는 그 하나의 생각으로 시작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인지라 모든 것이 어려웠다. 특히 이태리 유학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언어의 장벽이었다. 그 언어의 벽을 극복하느라 앞머리가 하얗게 쇠는 줄도 모르고 사전을 들고 다녔다. 그 사전이 다 닳아서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영국유학도 역시 자신에게는 몹시 버겁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일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한국인 유학생은 단 한명도 입학한 적이 없다고 하는 대학에 그는 들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또 자신이 가야 할 길이기에 그 길을 가수 잇으리라 믿는다. 영어공부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는 그가 자신의 나이를 잊은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문학하는 소녀의 마음처럼 한없이 여리고 섬세하고 겸손한 일이면, 그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당차고 분명하고 야무지다.
이태리 유학을 택할 그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생활이 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살고 있었다. 꽃연구가로서의 명성도 얻었고 마치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와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선뜻 모든 것을 접어둔 채 새로운 삶,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할 삶을 향해 길을 떠났다. 예전에 비해 경제적으로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늘 풍요롭게 행복하다.
11년 전 결혼생활의 실패라는 아픔도 이제와 돌이켜보면 역시 그 또한 자신의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 다행히 두 아이는 엄마인 자신의 삶을 이해하며 잘 자라주고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전생에 저는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생에 여자의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다시 역경을 통해 보살의 삶을 살아가라고 이렇게 이생에 다시 오지 않았나 합니다. 부처님 법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제가 가장 어려웠을 때마다 저의 삶을 지탱하며 일굴 수 있게 한 것이 다 부처님의 가피었지요.”
조각가 한기늠 씨의 법명은 보광화(普光華)다. 경남 산청 보현사 혜원 스님이 한기늠 씨의 얼굴이 관세음보살을 닮았다며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는 늘 어려울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닮으며 살아가고자 한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보살의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