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인연처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논산군

2007-11-03     관리자

역사에서 배우다시피 백제와 후백제는 모두 호남지방을 근거지로 일어났으나 삼국통일에는 실패하였다. 백제는 의자왕의 실정으로 나. 당연합군에 패배하였고 후백제는 신검(神劍)이 부왕인 견훤을 축출하고 왕위르 찬탈하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두나라가 최후의 결전장으로 삼은 곳은 우연히도 지금의 논산군 연산면 지역이다 황산이라고 불렀던 이곳은 백제의 계백장군이 오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모두 장엄한 최후를 맞았고 후백제의 신검도 이곳에서 완건의 부대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곧 황산은 대전 쪽에서 논산을 거쳐 부여나 강경,익산으로 가자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요충지였기에 역사의 고비에선 항상 전면에 부상하였던 곳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는지라 신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은 하늘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여황산(黃山)을천호산(天護山)이라
부르고 이제는 태평시대가 열린다는 의미에서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가을 들판을 가르며 개태사로 내려가 보자. 호남고속도로 서대전이 인터체인지에서 국도로 빠진 다음 논산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으로 계룡산을 주산으로 삼고 남향으로 앉은 계룡대(예전에는 이성계가 서울의 도읍지로 정했하고 하여 신도안이라 불렀다)를 지나 논산군 연산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초입에 개태사역이 있고 이역과 마주하여 개태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를 대전 논산간 포장도로가 달리고 있다.
왕건이 이 절을 처음 창건한 것은 936년,5년 후인 941년에 완공하고 낙성 화엄법회를 열고 스스로 불전에 고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 왕건의 사후에는 그의 진영을 모신 진전을(眞殿)을
세우고 국가의 대사가 있을때마다 사신이 이곳에 와서 길흉을 점치곤 하였다.
이처럼 국찰의 위치에 있던 개탸사는 스님2,000명이 머물만큼 큰 규모였으나 고려 우왕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저지른 방화.약탈로 큰 피해를 입게된다. 그래도 폐사는 되지 않고 근근히
근근히 명맥만은 유지 하였다. 왜냐하면 세종10년에 풍년들기를 원하다면 이 절을 옮겨야 한다는 진언이 있어 지금의 개태사 자리로 옮겼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조 14년에는 개태사 스님이 큰 수정석(水精石)2개를 왕실에 바치고 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업어 몇 백년동안 법등의 불길이 끓어졌다. 이러한 개태사가 다시 역사의 밝음속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오직 김대성화 보살의 공덕이다. 속명이 김광영(金光榮)인 대성화 보살은 논산군 가야곡면에서 이 연산면 천호리로 시집오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삼존불 중에서 관세음보살만 외롭게 서 계셨다. 이곳에서 조석으로 기도하기 30년 ,어느날 밤 관세음보살이 현몽하여 두 보살상이 매몰된 지점을 계시 하였고 대성화 보살은 그 계시대로 두 분의 보살상을 발굴케 되었다.
곧 주불이신 미륵부처님과 협시보살인 지장보살이었으니 때를 기다려 제자리에 모신 해가 1930년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장볼살님의 불두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여 찾을 길이 없다가 1986년 배수로 공사 중에 보살님 서 계신곳으로부터 서북쪽20m지점에서 지장보살의 두상을 발견케 되었다.
이리하여 몇백 년 전에 제각기 흩어져 있다가 만남의 인연이 성숙되고 한 보살님의 기도공덕이 성취되어 바로 예전에 서 계셨던 그 자리에서 다시 중생들을 어루 만지게 되었던 것이다. 더하여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법당도 함께 세웠는 바 그 목재도 남방의 수입 미송이 아니라 시베리아산 홍송을 썼다고 하니 세분 보살님들은 이렇게 서로 속삭이었는지 모르겠다.
‘서로 만남도 몇백 년이요, 옛터 위에 제대도 된 집까지 얻으니 이제 영영 헤어지지 말고 같이 지냅시다.’라고
솔찍히 말해서 개태사 삼존보살상이 예술적으로 정교하거나 아름다운 솜씨가 발휘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투박하고 거센힘이 느껴지는데 이는 후삼국 통일기의 고려 국력이라고 하겠다.
4m 가량의 거대한 불상에서 나오는 중량감과 신체 비례와 맞지 않게 큰 손이 주는 완력의 힘은 이제 후삼국을 통일한 당당함과 여유로움이라고 해야 올바른 평가라고 하겠다.
개태사에는 또 한가지 특이한 문화재가 있다. 바로 쇠로 만든 철확이다. 지름 3m,높이
1m, 둘레 9.4m인 이솥은 절에서 국을 끓일 때 쓰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폐사 이후에는
가뭄때 이 솥을 끌어다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게 되었다.
심지어 왜정 때에는 진기한 물건이라 하여 경성박물관에 출품되었다가 연산역에 실어다 놓은 것을 1944년에 전쟁물자가 달린 일제가 이를 부수려고 하자 뇌성벽력이 쳐서 파괴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연산공원에 있던 것을 이제야 제 자리로 모셨으니 이 철확도 세 분 보살님들처럼 기구한 운명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논산군의 문화재를 탐방하려는 독자가 있다면 가야곡면 중산리에 자리한 쌍계사를 지나쳐선 안 된다. 보물 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봉황루 마루에 신벗고 올라 앉아 맞은 편 대웅전의 꽃살 문짝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문짝에는 연꽃,모란,국화 등 6종의 꽃모양을 문살에 새겼는데 그문짝이 세월의 흐름에 씻기고 파여서 ‘자연스럽게 묵은 아름다움’을 은근히 내뿜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 보면 법당 기둥도 소나무가 아니라 괴목나무인데 미끈한 목재만 골라 쓴 것이 아니라 굽은 놈은 굽은 대로 쓰고 짧은 놈은 서로 이어서 썼다. 그러다 보니 기둥의 아래쪽은 대개 넓어져서 전체적으로는 둔중한 맛을 주는데 그런 무거운 맛을 없애려고 그랬는지 법당안의 닷집은 매우 날렵하게 짜 올렸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세 분 부처님 위에는 각기 닷집을 달았다. 특히 주존불인 석가모니불의 닷집에는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켰다는 고사를 응용하여 아홉 마리 용을 목각으로 설치하였는데 그 용모와 규격이 전부 달라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지리산 쌍계사처럼 논산 쌍계사도 두 계곡이 합해지는 안쪽에 자리하였는데 확실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1739년 (영조 15년)
에 세운 중건비가 절입구 부도밭에 아홉 개의 부도와 함께 서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이전부터
법등를 이어왔고 지금의 대웅전이나 봉황루, 나한전의 나한님들은 중건 당시의 조성으로 여겨진다. 세 분 부처님은 모두 목불인데 굳이 예술적 우열을 논한다면 부처님 상호보다는 닷집이 낫고 닷집보다는 문짝의 꽃살 문양이 낫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