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修行)과 불수행(不修行)

선심시심

2007-11-03     관리자

今日又只恁麽空過(금일우지임마공과)니
未知來日工夫如何(미지내일공부여하)오

‘오늘도 그저 이렇게 헛되이 보내니
내일 공부가 어떠할지 알 수 없구나.’

『선관책진(禪關策進)』, 남송(南宋)시대의 이암유권(伊庵有權) 선사의 명구. 14세에 출가하여 18세 때 무암전(無庵全)을 찾아갔을 때 ‘머문 바 없이 본래부터 일체 법이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아느냐’는 물음에 꽉 막혀 버렸다. 그후 오래 이것을 참구하여 마침내 깨치고 인가를 받았다.
선사의 정진이 심히 맹렬하여 저녁이 되면 하루 해가 가게 된 것을 눈물로 탄식하며 세월이 흐름을 못내 아쉬워 하였다. 그토록 화두 일념에 몰두하여,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도 도반과 더불어 한 마디 말조차 나누는 일이 없었다 전한다.
깨친 후에도 계속 밤을 세워 정진하고, 다시 천하 선지식을 참방하고 돌아와서 은사 무암전 선사와 분좌설법(分座說法)으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도량법전(道場法全)의 법을 이어, 남악회양(南岳懷讓)의 18세에 해당한다.
발심하여 촌음(寸陰)을 아끼어 공부하고, 깨치고 나서도 밤새워 정진한 한 표본을 이암유권 선사에게서 볼 수 있다.
수행을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다. 쉬운 것은 아니다.
어떤 선지식들은 수행이란 도시 헛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중국의 선지식 허운(虛雲) 스님은 그의 참선요지(參禪要旨)에서 그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수행한다고 하거나 안한다고 하거나 모두 헛된 말이다. 자신의 이 심광(心光)을 사무치기만 하면 그대로 할 일이 없어진다.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은 출가하여 도를 증득하고나서 ‘기이하고 기이하다.
온 세상의 중생들이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으나, 다만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하고 있구나. 망상만 여의면 곧 청정한 지혜, 자연히 갖추어진 지혜, 스승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혜가 저절로 현전할 것인데’라고 하시었다.
그 뒤에 조사들도 심, 불, 중생(心, 佛, 衆生)이 차별이 없다 하였고 또 직지인심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였다. 이런 점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전(現前)한 이 일념(一念)이 밖으로만 치달아 망상과 집착을 구하여 벗어날 줄 모르며, 무시 이래 생사에 유전하여 무명과 번뇌는 더욱 물들고 더욱 두터이 된 것이다.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알고나서도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주인노릇을 하지 못한다.
향상(向上)하는 자들도 종일 이리저리 선(禪)을 찾고 도(道)를 찾아 유심(有心)을 여의지 못하고, 향하(向下)하는 자들은 탐욕과 진에와 우치와 애욕이 굳어져 도를 등지고 달려간다. 이들을 위해서 어찌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 하겠는가.
이들이야말로 뜻을 세워 생사를 아프게 생각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정진수행하여, 도를 묻고 힘을 다해 참구하며, 늘 선지식을 찾아 지름길을 지시받아, 삿되고 바름을 가려야 한다.
끊는 듯, 오리는 듯, 쪼는 듯, 가는 듯하며 양자강과 한수(漢水)로 씻고, 가을볕으로 쪼이어 정밀하고 순일하게 나가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오늘의 우리로서는 수행정진이 필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초발심에서 초지일관 수행을 지속해나가지 못하는 거기에 바로 쉽지않음이 있을 것이다.
자아와 이기심을 초월해 버리는 것, 그것이 수행의 목표이지만, 거기서 미쳐 초탈하기 이전에 거기에 걸려 좌절되는 수가 많다.
우리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무가보주(無價寶珠)를 원래 사람마다 갖추고 있다는 것. 이것을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이 바로 망상이요 집착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는 열쇠가 곧 정진과 수행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