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대물림될 불사(佛事) 이야기

불자가정 만들기/한국불교미술원장 정규진 씨 댁

2007-11-03     관리자

정규진 씨는 요즘 너무나 기쁘다. 딱히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매사 거저 고맙고 기쁘기만 하다. 아,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둘째딸과 함께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도 여간 기쁘지 않다. 출퇴근길에 조계사에 들러 부처님께 합장배례할 때의 그 신선한 기쁨, 그 뿌듯한 행복감, 둘째 딸에게 전통불화기법을 전수하면서 같이 불화(佛畵)작업을 할 때의 감동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강산이 변해도 세 번도 더 변할 긴 세월동안 오로지 불화(佛畵)에만 매달려 온 금어(금어: 불상과 불화를 제작하는 사람), 정규진 씨(56세).
36년 동안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외길을 걸어온 정규진 씨와 그의 가정의 행복한 인연 이야기는 남달랐고 시간이 흐를수록 새록새록하기만 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정규진 씨와 그의 둘째딸 정소연(26세)씨가 함께 일하고 있는 한국불교미술원은 종로구 청진동 196번지 낡은 건물 3층에 오두마니 자리하고 있다. 그 건물의 빛바랜 채색이 오랜 연륜을 넌지시 일러준다.
20여 년 동안 이곳에서 탄생되어 각 사찰에 모셔진 후불탱화, 신중탱화, 감로탱화는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게다가 이곳에서 정규진 씨가 배출한 문화재 기사 기능자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른다. 그야말로 한국전통불화의 맥을 면면히 잇고 있는 불화(佛畵)의 전당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이곳이 원장인 정규진 씨의 지극한 신심으로 말미암은 수행과 포교의 도량이라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정규진 씨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불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 더더욱 어려운데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 법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맹구우목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명나게 들려 준다. 1남 4녀 자식들에게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부모의 지극한 신심을 바라보며 자란 자녀들은 티없이 맑고 착하게 자랐다. 너무 착해서 은근히 걱정도 된다며 크게 웃는 정규진 씨의 얼굴은 그가 그린 불화 속의 누구와 너무 닮았다.

인생을 열어준 부처님
"제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께서 열어주셨죠. 조상 대대로 대물림 받은 불심에다 이제 불화(佛畵)를 제작하는 불사까지 대물림해주게 되었으니 그저 불은(佛恩)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와 부처님과의 인연은 처음부터 아주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 몸이 몹시 쇠약했었다. 병약한 그를 보고 어른들은 혀를 차며 절에 가야 명이 길어질 거라는 소리를 자주 했다. 또한 집에 있을 때는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것처럼 앓다가도 절에만 가면 신비하게 씻은 듯이 낫는 것이었다. 어머니 따라 고향인 경남 거창의 관음사에 다니며 불심을 키웠던 그는 약한 몸 때문에 14세 때 아예 집을 떠나 절로 들어갔다.
'솔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림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그는 기왕이면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 부산 대성사로 들어갔다. 부산 대성사에서 한응(漢應) 스님으로부터 전통불화의 비법을 전수받은 그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자신의 남다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아마 전생에 화승(畵僧: 불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불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전생인연일 듯 싶다는 그의 말은 체험 속에서 우러난 것이랄까. 수백 년간 화승들에게만 비밀리에 전수돼 오던 기법을 배우는데 마치 오래 전부터 해본 것 같더란다.
"불화를 제대로 그리자면 먼저 시왕초 만 장 정도를 그리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하지만 단 10장 정도만 그려도 붓끝이 익숙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나 우리 딸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이룬 불화(佛畵)의 세계
"투철한 신심과 바른 불교 이해, 끊임없는 수행과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다소나마 증득하지 않고는 좋은 불화가 탄생할 수 없습니다.
서도, 예도, 검도, 무도 등 글씨 쓰는 것, 그림 그리는 것, 심지어 칼 쓰고 무술하는 것도 정신수양의 관점에서 얘기들하며 도(道)라는 말을 붙인다.
부처님의 세계를 재현해내는 화도(畵道)의 세계는 그 중에서도 으뜸이다. 신심만 있어서도 안 되고 불교만 알아서도 안 되고 함부로 행동해서도 안 된다. 엄격한 금기상황 속에서 정성을 다해 불공(佛供)드리는 마음으로 그려야 하는 불화는 실로 신해행증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그가 불화 그리는 사람이기보다 포교사처럼 보이는 것도 다 그런 데서 연유한 듯 싶다. 제대로 불화를 그리자면 반듯한 불자여야 하고 제대로 된 불자는 저절로 포교를 하게 될 것 아닌가.

부처님께서 짝지워준 부부인연
"불화를 잘 그리고 싶은 욕심에 법문 들으러 갔다가 결혼까지 하게 됐으니… 불화는 제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17세 때 서울로 올라온 그는 쌍룡사 설봉 스님에게 불경을 배웠다. 그 뒤 불모(佛母) 신상균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받는 한편, 서라벌 예대 야간학부에서 본격적인 불교미술을 배웠다. 그는 그 바쁜 나날 속에서도 불교공부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대의 석학 퇴경당 권상로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연화사에 갔다가 최보패 보살을 만난다. 최보살은 불교 공부에 열심이고 불화를 잘 그리는 그를 보자마자 자신의 무남독녀 외딸과 짝지워 주고 싶어 했다. 장모가 중매장이인 셈이지만 그와 그의 아내 김영자(54세)씨는 부처님께서 짝지워 준 인연임을 안다. 자식들 앞에 앉혀 놓고 이렇게 귀한 부처님 인연으로 엄마, 아빠가 만났고 너희들은 항상 부처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자주 해 준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철이 들면서 부모님께서 해주신 부처님 이야기가 피부에 와 닿아요. 어려운 작업을 하고 계신 아빠도 자랑스럽구요. 저 역시 태어나기 전부터 불자라는 사실이 참 자랑스러워요."라고 얘기하는 셋째딸 정희주(고대 산림자연학과 4)씨의 한마디만으로도 그 가정의 행복을 감지할 수 있을 듯하다.

육바라밀 실천으로 회향하며 살리라
"불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겁니다. 진정한 불자이기가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그는 불자라면 모름지기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불자로서 불화를 그리고 있는 나날이 기쁘고 고맙기만 하다.
불화를 그리다 보니 남들보다 보시하기(제5561부대 법당 불화, 서울 구치소 관음상, 대만 홍법원 등에 불화 제작 기증, 금곡 약수사 후원 등)도 쉽고 불화를 그리려면 자연 막행막식할 수 없으니 저절로 지켜지는 지계다. 몇날 며칠 꼼짝 않고 그려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보니 인욕은 생활습관이요,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맛에 사는 그이고 보면 정진은 몸에 밴 지 이미 오래다.
불화를 제대로 그리기 위해선 체력도 필수조건인 만큼 아침마다 참선을 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도모하고 있다. 선정과 지혜의 생활을 하려 애쓰는 그의 일상은 육바라밀 행을 실천하려는 불자의 삶 바로 그것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은 그는 생을 다하는 날까지 불화를 그리고 싶단다. 또한 지금까지 그때그때 인연따라 제작한 불화가 전국의 법당에 모셔져 있는데, 이제는 불교미술전시관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그냥 바라만 보아도 부처님의 세계에 들 수 있었으면 좋겠단다.
고려불화의 기법을 깊이 연구해서 오늘에 재현해보고 싶은 것도, 그동안 제작한 신중탱화, 감로탱화, 후불탱화 등을 도록으로 엮어 후학들에게 지침이 되게 하고픈 것도 다 그의 소박한 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즈막 가장 큰 바람은 둘째딸 정소연(서울예전 졸) 씨와 현재 중앙대 미대를 다니는 넷째딸 정보연 씨가 자신의 뒤를 이어 불화가가 되는 것이다. 두 딸의 성품이나 그 재질을 볼 때 반드시 대물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라 불려도 좋을 듯 싶단다.
환하디 환한 그의 얼굴, 딸들에의 기대에 부푼 그의 모습이 퍽이나 평화롭게 보인다. 사무실 벽면에 조용히 얘기하는 듯한 액자 속의 '정성고결심여수(鄭性高潔心如水) 규지이국기명진(奎志而國其名振)'이라는 명자 시구(名字詩句)가 빛을 발하고 있는 그의 삶터에서는 여러 부처님들과 그의 가족이 행복한 불사이야기로 날마다 웃음꽃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