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血緣)으로 지어진 불연(佛緣)

나의 인연이야기

2007-11-03     관리자

나는 늘 최고운(崔孤雲)의 후손임을 자랑삼는다. 그분은 가야산(伽倻山) 홍류동(紅流洞) 어귀에 이런 시를 남겨 놓고 있다.

광분첩석후증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이것을 나의 학우(學友) 석전(石田)형은 풀이하길,

바윗서리 섯돌고 깊은 골마주 울려
지척의 이야기도 가리기 어려웨라.
옳고 그른 수다가 내 귀에 다달까봐
일부러 물을 흘려 온 산을 감싼거야.

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조상 어른의 행적에 대하여 속속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그분께 서 나라의 쇠운(衰運)과 함께 이처럼 가야산이나 속리산(俗離山) 또는 그분의 유적이 많이 남아 전하는 희양산(曦陽山) 등지를 찾아 돌다가 그 생을 마치신 것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다. 나와 불교와의 인연을 말하려 하면 이만큼 먼 세월 속의 조상 어른을 들먹여야 한다.
불가에서는 ‘인신난득(人身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아라 하고 그 서로 만남의 인연을 일러서 ‘침개상투(針芥相投)’니 ‘맹귀우목(盲龜遇木)’이니 하여 실로 어려운 일임을 말하고 있다. 이만큼 어려운 일을 열게 된 직접적인 인물은 나의 나의 중백부(仲伯父)로서 이분이 늦깎이로 불교에 입문한데서 시작된다.
나의 중백부는 원래 도편수(都片手)로서 말하자면 목수(木手)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결혼을 하여 고향인 상주(尙州) 땅을 중심으로 이 절 저 절의 건축불사(建築佛事)에 종사하다가 뜻밖에 처자가 모두 일찍이 세상을 뜨게 되자 크게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체발위승(剃髮爲僧)하여 당호를 남파(南坡)라고 하고 원조(遠祖)이신 고운의 유적지를 더듬어서 희양산에서 수도하는 선승(禪僧)이 되었다.
고운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이었다지만 그분을 세상사람들은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이라고 말해 놓고 있음을 생각하면 불교를 멀리하지 않으신 선객(仙客)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이처럼 후손으로 하여금 불교와의 만남을 인연지워 주신 것만은 확실하다.
나의 중백부인 남파당은 우리집에 자주 출입하셨지만 끝내 불교에 무관심했던 나의 선친(先親)은 불교와 가까워질 수가 없었고 그 대신으로 나의 셋째 형님을 중백부에게로 입양(入養)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출가하게 했었다. 나의 이 사형은 당호를 춘성이라 했다.
나의 불교에의 입문은 이 춘성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출발된 것으로써 말하자면 혈연(血緣)으로서의 인연이 불자에로의 인연을 이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라 이르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다행과 지복(至福)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사형 춘성당은 나를 불교로 인도한 스승이다.
나는 4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중․고등학교에서 또는 대학 강단에서 교육에 몸바쳐 오면서 묘하게도 여러 종교와 맞부닥치게 된 체험을 갖고 있다. 참으로 기연(奇緣)이었다.
천상천하에 무여불(無如佛)이다. 내가 만일 불교와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요만큼의 탈속(脫俗)에 대한 희원(希願)이라도 갖고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우리의 문호(文豪) 춘원 이광수를 늘 생각한다. 그도 여러 종교와 부딪쳤었고 그의 생각의 깊이를 불교로 이끌어 준 이가 종제(從弟)인 운허당(耘虛堂) 이학수(李學洙) 스님이었다.
그는 소설『이차돈의 사(死)』나 『원효대사』등에서 우리에게 큰 빛을 보여주고 있다. 그 빛이란 불교가 갖는 위대한 사상 곧 보살정신을 이른다. 이만한 작가가 이어져 나오길 기대하는 나는 지금 허망과 함께 스스로 부Rm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불교의 세계, 그 넓고 높고 큰 세계를 문학 속에 펼쳐 보여 줄 문학인이 그립다. 내가 이광수 문학의 불교사상을 연구해 온 그 성과의 여하와는 관계없이 다만 내가 불자가 못 되었더라면 어찌 이런 ‘우리 문학에의 바람’을 실토할 수가 있을 것인가?
소위 나는 문학을 공부해 왔다. 그러면서 나와 이처럼 인연지워진 불교를 떠나서는 그 공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바꾸어 말한다면, 불교는 이런 미미한 문학자로서의 나의 생명이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