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와 원숭이의 길

2007-11-01     관리자

   1. 국제도시 <다질링>

 히말라야 산맥의 동쪽 끝머리가 티벳고원과 인접한 지역에 부탄,시킴 같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이 고요히 조는듯이 누워 있다. 나라의 규모도 인구 100만을 밑돌만큼 작다. 북쪽은 바로 중국 대륙의 티벳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남쪽은 인도 대륙의 아쌈.나가랜ㄷ, 그리고 네팔 등과 접경하고 있다. 옛날 인도 동부로 부터 중국에 이르는 또 하나의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8세기 이후 아프카니스탄을 통하는 서북구 실크로드가 아랍인들이 끊임없는 침공으로 위협받고 있어서 네팔, 시킴, 티벳으로 이어지는 이 실크로드는 교역하는 상인들로 붐볐을 때도 있었다. 왕래하는 상인들과 함께 불교를 전교하는 포교승들과 불교를 공부하러 인도로 가는 구법승들도 이 실크로드를 거쳐서 지나갔다. 6세기 이후, 인도 동부 지방에서 전성했던 불교, 특히 밀교는 이 딜을 통하여 티벳을 거쳐 중국에 전파되었다. 비클라마실라 나 날란다 같은 대 사원이 이슬램에 의하여 파괴될 때, 많은 스님들은 이 길을 따라 티벳으로 망명했다. 그래서 티벳불교, 특히 밀교는 인도에서 망명한 스님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발전되었다. 따라서 이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한 부탁이나 시킴에도 일찍 밀교가 전래되어 티벳밀교의 영향을 받아 발전외었다. 그들의 얼굴 모습도 티벳인을 닮아서 몽고계이므로 우리 얼굴과 다를바 없다. 그런데 인도 동부에서 시킴을 가는 도중에 <다질링>이라는 고산 마을이 있다. 해발 2,500 부터 3,000m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래서 캘카터를 근거지로 인도를 식민통치하던 영국인들은 여름이면 중앙 행정부를 여기로 옮겼다. 그러니깐 캘카터는 겨울 수도이고 다질링은 여름 수도인 셈이다.

 내가 다질링을 찾은 것은 4월 중순, 찌는 듯이 덥던 캘카터의 낮 더위가 40도를 오르고 있을때, 다질링은 10도밖에 되지 않는 서늘한 날씨다. 난로에 불을 때지 않고서는 추위를 견디기 어려울 만큼 밤 공기는 차다. 다질링은 인종과 언어의 잡동산이다. 몽고계의 티벳인들이 있는가 하면 아리안계의 인도인도 있고, 히말라야 산악에만 사는 네팔계의 셀파족, 그리고 몽고인을 닮은 시킴과 부탄인들도 함께 살고 있다. 따라서 언어도 각양각색이다. 길 건너 티벳 가계에서는 티벳어로 장사를 하고, 길 이쪽에서 인도인들은 힌디어로 장사를 한다. 네팔어, 부탄어,시킴어 등 언어의 다양성도 인종의 다양성과 비례한다. 마치 국제도시를 찾아온 기분이다.

   2. 신비에 싸인 산, <칸첸즁가>

 어느날, 이른 아침, 호텔 지배인이 다급한 소리로 호텔 옥상으로 빨리 올라 오라는 것이다. 멀리 시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칸첸즁가>가 보인다고 외친다. 높이 8,000m의 칸첸즁가는 고르지 못한 다질링 기후 때문에 좀처럼 보기 힘들다. 다질링은 1년 동안 구름과 안개로 덮이는 날이 더 많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 7000여 이상의 산들이 있건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미국인은 석달 동안 머물면서 칸첸즁가를 구경하려고 하였으나 기어히 못보고 말았다는 얘기를 호텔 지배인이 들려 주었다.

 옥상에 올라간 나는 전면 시야를 가린 거대한 백색병풍에 압도 당한 느낌을 받았다. 하늘과 땅 사이를 전부 가로막는 거대한 병풍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과연 이름 그대로 칸첸즁가의 위봉이었다. 그 순간, 나는 말을 잃고 그냥 우두커니서서 그 순백의 칸첸즁가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한 순간이었다. 칸첸즁가는 다시 짙은 안개에 가려져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칸첸즁가의 인상이  너무 강렬하고 압권 되었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위용에 압도당하기는 처음이다. 그만큼 칸첸즁가는 거창하였다. 시킴에서 큰 절은 칸쳍즁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밀교 사원은 그비밀의 깊이를 칸첸즁가의 높이에 비유한다는 말을 들었다. 시킴과 전설과 신화는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칸첸즁가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정신세계의 압도하는 칸첸즁가이므로 시킴의 문화는 칸첸즁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이루어졌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칸첸즁가에는 여러 산신령이 살고 있으나 칸첸즁가 자체는 의인화 된 신령으로 시킴 신화나 전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칸첸즁가에 살고 있는 모든 사신령들은 한결같이 칸첸즁가를 우러러 <지고의 존재>로 섬기고 있지만, 인격화된 산신으로는 섬기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거대하고 지나치게 거창하여 의인화된 산신령으로 모시기에는 <인간적 냄새>가 풍겨서 송구스럽다는 것이 시킴인들의 솔직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추상적지고의 존재로서 아늑한 지위에 모셔놓고 그 앞에서는 항상 경건한 마음 자세로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시킴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외인이 칸첸즁가로 들어가는 것을 <금기사항>으로 고수하고 있다. 어떤 권력이 발부한 등산허가증도 칸첸즁가에는 등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거룩한 신성성을 지닌 지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추상화된 칸첸즁가를 위하여 시킴에 사는 인간들이 막아야 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칸첸즁가를 밟고 올라간다는 발상부터가 이미 <불경죄>를 저지른 사상범에 속한다고 시킴인들은 믿고 있다.

   3. 노승의 우화

 칸첸즁가를 맑은 날이면 정면으로 바라 보면서 기도할 수 있는 다질링 교외의 언덕에 티벳 피난민들이 세운 밀교사원이 있다. 티벳 양식으로 세운 곰파(사원)의 주변에는 그럴듯한 촐첸(탑)도 있어 밀교사원으로서의 구색은 갖추고 있다. 그 곰파에서 80세가 넘은 노승한 분을 만나 달라이.라마 와 함께 티벳에서 인도까지 피난 왔던 곡나의 역사를 상세히 듣게 되었다. 6척이 넘는 건강한 체구를 한 느승은 그동안 겪었던 여러가지 사연을 들려 주었다. 노승의 인생 역정은 그대로 티벳 현대 불교사를 방불케 했다. 거의 생애는 슬픔과 고난으로 점철된 고통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나, 모든 인생고를 달통한 노승의 얼굴과 목소리는 어린 아이처럼 맑기만 했다. 안개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노승은 새벽마다 칸첸즁가를 향하여 합장 배례한다고 하며 칸첸즁가같이 위대한 존재 앞에서는 거짓을 꾸밀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을 항상 맑고 깨끗하게 가지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첸즁가의 모습을 본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한 동안 엄숙한 표정을 짓고 칸첸즁가의 방향을 향하여 합장한 다음 <자기는 칸첸즁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면 그 자리에서 땅위에 업드린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 거룩하고 위대한 존재를 뜬눈으로 쳐다 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티벳 특유의 차를 마시면서 노승의 말은 그칠 줄 몰랐다. 해가 저물어 자리를 뜨려고 하는 나를 멈추게 한 노승은 끝으로 한마디 하겠다고 하면서 <코끼리의 길과 원숭이의 길> 이란 거의 창작 우화를 들려주었다.

 노승의 우화에 의하면, 인생을 사는데 두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코끼리의 길과 원숭이의 길이다. 모든 사물을 달관하고, 나보다 남이나 사회를 위하여 조용히 그리고 신중히 살아가는 것이 코끼리의 길이다. 이와는 반대로 항시 불안하여 한자리에 1초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하며 남보다 나를 위한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것이 원숭이의 길이라는 것이다. 노승은 스스로 코끼리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해 왔다고 술회했다. 큰 코끼리는 길을 걸어 갈때, 원숭이가 달려들 건, 강아지가 짖어대건, 개의치 않고 그대로 저 갈길만을 가는 자세를 노승은 배웠다고 하면서 중국 공산당치하에서 고난을 이겨낸 체험을 말해주었다. 젊은 공산당원이 지독한 고문을 하고, 참아 듣지 못할 욕지거리를 했어도, 그는 코끼리 같이 묵묵히 견디어 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중의 코끼리고, 산중의 코끼리가 바로 칸첸즁가 라고, 티벳 노승은 단정한다. 그러면서 나더러도, 원숭이 같이 살아가지 ㅁ라고, 코끼리같이 살아갈 것을 당부하면서 다시 주름살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 보니, 노승의 얼굴이 흡사 코끼리처럼 생겼음을 알았다. 노승과 작별할 때도 칸첸즁가는 여전히 짙은 안개에 가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