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의 선(禪)수행을 위하여 VII

재가의 선수행

2007-11-01     관리자

태어난 자 반드시 죽는다(生者必滅)
사람은 태어나 삶을 살아가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황금, 권력, 명예에 눈이 어두워 이들을 갖게 되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게 될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그 증거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은 흙으로 돌아갔으며 요즈음 문민 개혁시대에 탈법적으로 재물을 모은 사람들, 초법적으로 권력을 휘두른 사람들, 분수에 넘치는 명예를 탐했던 사람들 모두가 자기의 전력이 들어날까봐 어쩔줄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육체적인 삶은 끝이 있으나 우리 인간은 얼마든지 자연에 순응하면서 실질적으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재미나는 일화가 있다. 옛날 나한(羅漢) 스님이 길을 떠나려는 제자 법안(法眼) 스님에게 갑자기 앞에 있는 큰 바윗덩어리를 가리키며 “저 바위가 네 마음 밖에 있느냐 아니면 네 마음 안에 있느냐?” 하고 묻자 제자는 “마음 안에 있습니다.” 하고 들은 풍월에 의해 자기 딴에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스님께서 “그러면 무거운 돌을 마음 안에 가지고 길을 떠나니 네 발걸음이 참 무겁겠구나!” 했다. 사실 바위에 한할 것이 아니라 황금, 권력, 명예를 포함한 온갖 집착들이 우리의 하루하루 삶 속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즉 우리의 마음이 힘에 겹게 너무 무거워져 있는 것이다.
한편 물리학에 재미나는 현상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정지질량이 영인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만 하면 아무리 짧은 시간 간격도 영원으로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의 짐(질량)을 줄이고 줄여서 영으로 만들면, 즉 집착을 완전히 떠나면 우리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념적인 것이고 하루하루를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마음의 짐은 온데간데 없고 순간순간 더불어 함께 하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의 경계가 뚜렷해질 것이다.

지옥의 바른 이해
지옥은 지금 살아있는 우리와는 당장 무관한, 죄지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지금 우리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지옥에서 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근심걱정없이 산 날은 어렸을 때를 빼고는 거의 없다. 이것이 지옥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스님의 일화를 살펴보자. 노스님이 제자를 데리고 행각을 하던 어느 때 개울가에 이르렀는데 한 여인이 개울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너 주었다. 그 후 젊은 제자는 안절부절하며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석양이 질 무렵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스님! 계율에 분명히 사문은 여인을 가까이 하면 안된다고 하는데 오래 수행하신 스님께서 그래도 되는지요?”하고 따졌다. 그러자 노스님 “나는 여인을 오래전에 개울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그 여인을 아직도 네 마음속에 품고 왔구나!”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젊은 스님은 계율지옥에서 헤매고 있었고 노스님은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기왕 말이 난 김에 계율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겠다. 어느 때 법안 스님이 사부대중 남녀들이 절에 들어오자 옆에 있던 영명 스님에게 물었다.
“계율에는 담장너머로 비녀와 팔찌소리만 들어도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것[破戒]이라고 하는데 금은이 뒤섞이고 벼슬아치들이 가득 찬 것을 마주보면 이는 파계인가 아닌가?”
이때 영명 스님은 “도에 들어가는 좋은 길입니다.[好箇入路].”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법안 스님은,
“그대는 뒷날 오백의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왕족의 존경을 받을걸세.”라고 하셨다.
사실 황금, 권력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만일 황금과 권력에 끄달리지 않고 대중의 어려움을 위해 쓸 곳에 제대로 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 한 이야기가 있다. 경허 스님과 상좌인 만공 스님이 탁발을 많이 해가지고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경허스님이 가만보니 만공 스님이 꽤 무거워 하는 눈치였다. 마침 길 옆에 있는 밭에서 젊은 부부가 밭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경허 스님이 갑자기 젊은 아낙에게 다가가서는 뽀뽀를 하고 줄행낭을 쳤다. 그러자 젊은 농부가 시퍼런 낫을 들고는 “이 돌중들 잡아라!” 하고 쫓아오니 만공 스님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경허 스님을 따라갔다.
한참을 도망간 후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아직도 짐이 무거우냐.”하고 말씀하시자 만공 스님은 “짐 무거운게 뭡니까! 목이 붙어 있는 게 다행입니다.”라고 말했다.
경허 스님은 그의 독특한 가르침으로 하중(荷重) 지옥으로부터 만공 스님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암 스님이 간곡히 말씀하셨듯이 경허 스님의 깨달은 바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 행실은 경허 스님으로 충분하니 더 이상 아무도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밭에서 일하고 있던 젊은 부부가 받은 충격과 그로인해 선(禪)을 잘 모르는 많은 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깊이 숙고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재가(在家)의 이야기를 해 보자. 도둑들이 죄짓고 밤에 제대로 발을 뻗고 자지 못한다고 한다. 경찰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잡힌 도둑은 “이젠 잡혔으니 발뻗고 잠 좀 자야겠다.”라고 말했다 한다. 도망지옥에서 해방은 됐지만 보다 바람직한 해방은 자수하는 길이었을 것이며 제일 바람직한 것은 죄를 짓지 않고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한편 빚진이들은 전화 벨 소리만 울리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한다. 빚독촉 전화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심한 경우는 흉악한 해결사들을 동원해 공포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지옥도 따지고 보면 모두 자기가 스스로 행한 결과인 것이다. 평소에 자기 분수에 맞게 더불어 함께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면 결코 이런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지옥은 살아 생전에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함께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지옥과 극락에 걸림이 없는 늘 깨어있는 참나를 바로 찾아야 할 것이다.

망년(望年) 모임의 바른 이해
이제 올해도 다 저물어 가고 있다. 언제나 이맘 때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대부분 망년(忘年: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 한글 1.5의 한자사전에도 오직 이 단어만 들어 있음) 모임을 서너군데 참가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때일수록 바른 재가 수행자라면 남들이야 어떻게 망년(忘年) 모임을 갖든지 간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또는 아직 이런 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혼자만이라도 한 해를 돌이켜보며 스스로의 허물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뜻있는 새해를 맞이할 망년(望年) 모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즉 이 모임을 통해 정말 올해는 참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했었나? 또한 입으로만이 아닌 남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진심으로 애를 썼었는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는 그 진심을 잃지 말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할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태도는 머리로만 다짐해서는 불가능하며 바른 스승[正師]과 좋은 친구[善友]와 본인의 꾸준한 수행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런 태도로 한 평생을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본인 스스로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의 대장부임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 ‘재가선에서 알아야할 점’편을 끝내고 다음 호부터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선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선(禪) 속에 약동하는 인생’편에서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