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의 선(禪)수행을 위하여 Ⅴ

재가의 선수행

2007-11-01     관리자

처음 먹은 마음지키기〔禪心初心〕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굳센 결심을 하며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주위환경은 대개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우리의 각오가 흐지부지되는 예가 너무 흔하다. 우리 속담에 “처음 먹은 마음이 삼일을 못 간다(作心三日)”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참선 수행을 통해 다져진 결심은 주위환경도 어쩌지 못한다. 왜냐하면 참선 수행을 통해 수행자의 마음은 주위 환경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도 않을뿐더러 참선 수행을 통해 길러지는 태산도 거꾸러뜨릴 듯한 기개는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참선 수행은 처음 먹은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며 열심히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전부이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지금 온 나라가 떠들썩한 문민개혁시대의 성패도 따지고 보면 ‘처음 먹은 마음지키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좋은 스승 만나기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선수행을 할 때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한 수행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선수행이 좋은 줄은 알면서 뛰어들지 못하거나 뛰어들었다 해도 중간에 그만두고 있다. 이럴 때 도움을 제대로 줄 수 있는 분이 바로 좋은 스승인 것이다. 사실 나도 종달(宗達) 노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선수행을 벌써 그만두었으리라 생각된다.
좋은 스승이란 선에 관한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길을 안내할 뿐이다. 스승과의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수행한 경계를 나타내 보이고 스승에게 무의식중에 온 몸으로 설법을 하며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것 같이 간절하게 제자를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해준다.
특히 좋은 스승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 어미 닭이 껍질을 쪼아주듯이(誶啄同時) 수행이 무르익어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제자를 이끌어 준다. 만일 나쁜 스승을 만나 완전한 병아리가 되기도 전에 껍질을 쪼아준다면 세상 구경도 못하고 알속에서 곯아 버리게 될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좋은 스승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본래 두드릴 문도 없지만)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열심히 찾아 보라. 반드시 좋은 스승을 만날 것이다. 또한 좋은 스승은 제자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며 이것은 우리가 머리로 생각하는 작용을 막아주며 온 몸으로 화두를 들게 한다.
궁하면 통한다〔窮卽通〕라는 말이 있듯이 더 이상 기댈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지금까지 얽어매고 있던 틀은 사라지고 시원스레 무언가 튀어나온다. 이렇게 스승과의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화두를 하나하나 점검해감에 따라 일상생활 속에서 점점 폭 넓어 가는 경험의 세계를 느끼되 된다. 나의 경우 일주일에 한번씩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가장 뚜렷한 것은 하루 하루가 이어지고 삶의 의미가 점점 확실해져 가는 것이었다.

불립문자의 바른 이해와 책읽기
10월은 독서의 계절이다. 그런데 선가(禪家)의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을 잘못 오해하고 불교경전뿐만 아니라 주옥같은 선수행 지침서들을 외면하는 분들이 있기에 이를 바로 잡고자 한다. ‘불립문자’라는 말은 무문관(無門關) 제6칙의 본칙(本則)에 그 유래가 잘 담겨 있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석가께서 옛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대중(大衆)에게 보였으나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만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가께서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
(正法眼藏 涅槃妙心)
실상무상 미묘법문
(實相無相 微妙法門)
불립문자 교외별전
(不立文字 敎外別傳)
이 있으니 이를 가섭에게 전하노라.“
라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석가께서 깨달은 경계를 말이나 글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석가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제자들을 위해 사십 구 년 간 설법하신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석가께서 세상을 뜰 무렵 자기는 사십 구 년 간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고 한 것은 자기가 설한 말이나 글 자체에 사람들이 얽매이는 것을 막기 위해 친절하게도 다시 한번 다짐한 것이지 결코 말과 글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선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불립문자’라고 해서 오로지 다리만 틀고 앉아만 있어서는 정말 곤란하다.
사실 자기의 수행이 닦아 가는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글을 접하다보면 자기의 경계를 다시 확인해 볼 기회도 갖게 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을 빌어 자기의 체험의 경계를 가능한 알기 쉽게 나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된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이 자기의 것으로 된 때인 것이다. 즉 자기의 말과 글인 것이며 뒤에 그 보기를 들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같은 말과 글이면서도 먼저 썼던 분들의 외침보다 더 호소력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즈음 세상은 좋아져서 읽기에 편하고 이해하기가 쉬운 좋은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젊은 세대조차 너무 책을 멀리하고 있다. 비단 불교에 관한 책뿐만 아니라 종교를 떠나 멋진 삶을 살아간 분들의 값진 체험이 담겨 있는 글들을 접하다 보면 그런 가운데 자신의 체험의 폭도 넓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꾸준히 책을 가까이 해 보라! 언젠가는 말과 글의 한계를 뛰어 넘어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 자체가 자신 속에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이다.

술몽쇄언을 지은 월창(月窓) 거사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던 공리(貢吏)의 집안에서 태어난 월창 거사는 열 살 때에 이미 여러 글에 두루 통달하였다.
유가(儒家) 및 도가(道家)의 책들을 널리 읽어오다가 마흔의 나이에 처음으로 불가(佛家)의 능엄경(능嚴經)을 읽고 크게 느낀 바 있어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불가의 책에만 몰두하였다.
그런데 죽음에 임박해서 자기의 모든 저서를 다 불살라버리고 (아마 덕산 스님이 용담 스님을 만나 등에 지니고 다니던 금강경소초를 불살라버릴 때의 심정이었으리라.) 단지 자학정전(字學正典)과 선학입문(禪學入門) 및 술몽쇄언(述夢鏁言)만을 남겼다.
그는 이 술몽쇄언이라는 책에서 ‘삶은 꿈이다!’라고 갈파하면서 불가의 정신은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단 하나의 불(佛)이라는 자(字)에 때가 낄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 명저를 남겼다.
그는 당시 이조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한(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것을 꿰뚫어보고 어떻게 하면 이들로 하여금 참나〔眞我〕를 찾게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이 책을 쓴 것 같다. 아쉽게도 술몽쇄언의 발문을 쓴 유운(劉雲)을 빼고는 뚜렷이 제자를 남긴 흔적은 없다. 근세에 뛰어났던 월창 거사의 정신을 바로 새겨 보며 뜻이 있는 분 모두가 끊어진 월창 거사의 대를 잇기를 바라며 독서의 계절에 부디 한번 읽어보기를 부탁한다.
참고로 말한다면 월창 거사에 관한 글은 나의 책 읽는 습관 때문에 접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한 달에 두 번은 꼭 책방을 간다. 그러다 보면 눈에 뜨이는 책이 있어 사게 되는데(인연 닿는 대로) 술몽쇄언이란 책도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은 특히 내가 그저 막연하게 종달 노사 밑에서 참선을 지도 받던 어느 날, ‘삶은 꿈이다!’ 하며 나에게 다가와 나로 하여금 철저히 거사의 길을 걷도록 마음먹게 한 중요한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