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의 의미

2007-11-01     관리자

“얘야, 밥 먹고 바로 드러누우면 이 담에 죽어서 소로 태어난단다. 소가 되고 싶지 않거든 냉큼 일어나거라.”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두 번쯤은 들어 보았을 어른들의 걱정이다. 이는 식후에 바로 누워, 먹은 것이 체할까 염려하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그 바탕에 ‘게으른 자는 반드시 벌받는다.’는 가르침이 담겨져 있다. 먹고 눕고 하는 것은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의 상징이며 그 인과응보로 사후(死後)에는 환생하여 평생토록 일만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듯 우리네 조상들은 예로부터 게으름을 죄악시하고 땀흘려 열심히 일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여겨왔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를 토대로 한 칠월 칠석 명절에서도 그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칠석 명절을 크게 기리는 풍속이 많이 퇴색하였고, 다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서양의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를 대신해 이날 연인들끼리 찰떡을 주고받자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견우와 직녀의 애절한 사랑에 착안한 발상으로 보인다.
서양문물에 흡수되는 것을 스스로 저어하여 우리 것을 찾는 노력임이 분명하기에 나무랄 수 없는 일이지만, 칠석에 얽힌 이야기가 단순한 사랑타령만은 아니라는 점은 짚어 볼 일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견우는 소치는 목동이요, 직녀는 베 짜는 처녀로 옥황상제의 손녀였으며 이들의 부지런함에 탄복한 옥황상제가 이들을 혼인시켰다. 혼인한 견우와 직녀는 신혼 재미에 빠져 게으름을 피우면서 전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에 이에 분노한 옥황상제가 둘을 갈라놓고 일 년에 한 번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 날이 음력 칠월 초이레 칠석 명절인 것이다. 이 설화 속에는 ‘게으르면 벌받으며 그것은 옥황상제의 손녀도 예외는 아니다.’라는 깊은 뜻이 있다.
산업사회가 시작된 지 오래되어 현대문명은 날이 갈수록 발달하고 있다. 이제는 점차 사람의 손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 옛 설화 속의 교훈이 무색할 지경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옛날 얘기를 들추어내어 억지로 옛날처럼 어렵게 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만은 오늘에 남겨 현실에 맞게 되새길 줄 알아야 한다.
요즘 오렌지니 낑깡이니 하는 서양 과일 이름을 앞에 붙인 족(族)들이 압구정동․홍대앞․신촌 등지를 활보하면서 하룻밤 새 수백만 원씩 쓰고 다닌다는데 아연실색할 일이다.
이 족(族)들이 과연 열심히 일하여 흘린 땀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이들에게 땀이란 헬스클럽에서, 디스코클럽에서, 록카페에서 흘리는 것이 전부일지 모를 일이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왜 일해야 되죠? 신나게 노는 데만 해도 인생은 모자라요. 난 정말 시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라구요. 부모들이 일해서 벌어다 주는 돈을 자식이 쓰는 게 왜 나빠요?”
이들이 펑펑 쓰는 하룻밤 돈 액수만큼을 모으기 위해 몇 년 동안 땀 흘려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데, 그렇다면 이들에게 유흥비를 대는 그 부모들은 수십 배 이상의 땀을 흘리고 있어야 계산이 맞다. 그러나 세태는 그렇지 않다. 묵묵히 일하기보다는 약삭빠르게 돈을 굴리고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큰돈을 버는 세상에서 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매일 절망한다. 성실을 근본으로 삼으며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문민시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면서 한바탕 사정의 칼바람이 지나갔다.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부(富)를 집어삼킨 사람들이 많이 들춰졌지만, 아직도 서민들은 사는 형편이 나아진 바 없으니 보다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하지 않고 번 돈, 구린 돈을 가진 사람들을 겨냥하여 경제조치의 일환으로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그 발표에 즈음하여 몸 불편한 장애인 노점상들을 쫓고, 살겠다고 벌인 그들의 노점상을 압수해 가는 구청직원의 모습이 TV에 방영되었다. 땀 흘릴 수 있는 작은 터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 땀흘린 보람을 역설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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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은 ‘92년 연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인턴」에서 기자로 있었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