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마음, 깊은 불심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경기 안성군 지역

2007-11-01     관리자


여름답지 않았던 더위도 가을 바람에 속절없이 스러져서 안성으로 가는 차창 밖으로는 코스모스가 넘실거린다.
‘안성’하면 생각나는 말이 ‘안성맞춤’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유기(놋그릇)가 전국적으로 그 명성이 알려졌기에 ‘안성에서 맞춘 유기’라는 뜻의 말이 줄어져서 ‘안성맞춤’이 되었다.
안성(安城)은 그 땅이 비옥하고 산수가 순한 탓에 인심이 순박하다. 옛 시인은 이곳을 지나며 이렇게 읊조렸다.

山水姻雲老
桑麻歲月深
春歌與樵笛
但足太平心
(산청경개 그윽해서
뽕밭 삼베 무성하다.
봄 노래 나뭇꾼 피리소리
누구에게나 태평한 마음)

안성군의 주산은 칠현산(七絃山)이다.
백두산의 정기를 머금은 백두대간(白頭大幹, 곧 태백산맥)이 동해를 끼고 남으로 달리면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을 차례로 낳고 태백산은 서남쪽으로 가지를 쳐 소백산을 세웠다. 소백산은 서남쪽으로 나아가며 속리산을 낳고 속리산은 서북으로 거슬리며 칠현산을 만드니 칠현산은 또한 서운산(瑞雲山)과 비봉산(飛峰山)을 거느렸다.
산색이 수려하면 좋은 도량이 있는 법, 칠현산에는 칠장사(七長寺)가 있고 서운산에는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자장율사가 636년에 창건한 칠장사는 고려 초기 혜소(慧炤)국사가 백련암에서 수도하던 중 7명의 악인을 제도하여 도를 깨닫게 하였으므로 산의 이름을 칠현산이라고 하였다.
옛날 백련암 자리에 서 있는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 보물 488호)는 1060년에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을 맞아 이 절에 침입한 가토 기요마사에게 어떤 노인이 나타나 그의 잘못을 몹시 꾸짖었다.
화가 치민 가토는 칼을 빼어 노인을 치니 노인은 홀연히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며 붉은 피를 흘리었다. 혼비백산한 가토는 크게 놀라 도주하였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한다. 현재 혜소국사비는 잘라진 부분을 수리하여 세워 놓았으나 붕괴를 우려하여 비신, 귀부, 이수를 각기 따로따로 진열하였다.
이 비도 동시대의 다른 비들처럼 비신은 섬약하고 귀부와 이수가 큰 편이다. 그러나 그 글씨는 구양순체의 해서로서 붓의 힘이 세고 엄정하여 고려시대를 대표할만한 필력을 갖추었다. 칠장사 입구의 도로 곁에 서 있는 철당간지주도 역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철당간지주는 청주시내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지주, 계룡산 갑사의 철당간지주와 더불어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풍수가들에 의하면 칠장사는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형세이므로 이 철당간으로 배의 돛대를 삼았다고 말해지고 있다. 칠장사는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보물 983호)이 모셔져있다. 봉업사는 지금의 이죽면 죽산리에 있던 절로 그 터에는 당간지주와 5층석탑(보물 435호)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일러 준다.
이 터에는 출토된 반자(飯子, 사찰에서 대중에게 알리기 위하여 쓰는 금속제 북의 일종)에 죽주 봉업사 정우 5년(竹州 奉業寺 貞祐五年)이라는 새김이 있어 봉업사지가 바로 이곳임이 확인된다. 예나 지금이나 죽산은 교통의 요지이다. 죽산에서 북으로 올라가면 용인이 되고 남으로 내려가면 광혜원에 닿으며, 동으로 가면 음성, 서로 가면 안성읍이 된다.
교통의 요충지에 많은 사찰이 있었음은 그 동안의 답사를 통해서 확인한 바이나 사통팔달로 뚫린 이 길목에 봉업사가 있었음도 필연에 가까운 일일 터이다. 봉업사 석불입상은 전체적으로 늘씬한 모습을 갖춰서 신라불상을 따르는 듯하지만 고려양식도 만만치 않게 나타나 있다.
둥근 어깨, 가는 허리, 도톰한 뺨, 작은 눈, 뚜렷한 무릎 등이 인체를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탄력감이나 유려함이 부족하여 어딘가 굳고 정체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점이 신라 석불과 다른 감을 우리에게 준다.
불상 뒤의 광배도 신체에 비해 너무 큰 듯하고 불꽃무늬도 너무 좁게 나타내어 도식화하는 기미를 보여준다.
또한 칠장사는 벽초 홍명희가 쓴 『임꺽정』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갖바치가 출가해서 만년을 이곳에 살며 생불(生佛)이라 추앙 받았고 지금도 절 아랫마을 사람들의 구전으로 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디에서나 발길에 채이는 기왓장, 절 입구와 뒤쪽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부도들, 7명의 나한―물론 혜소국사가 제도한 나한들―을 조각물로 상징해 모신 노송 밑의 아주 조그마한 나한전, 조선시대의 건물인 법당들이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어우러진 칠장사. 들어가긴 쉬워도 나오기는 싫은 청정도량을 힘들게 벗어나 청룡사로 간다.
안성시내를 거쳐 도착한 청룡사는 1265년(원종 6년)에 명본(明本)대사가 창건하여 대장암(大藏庵)이라고 하였던 것을 1364년(공민왕 13년)에 나옹화상이 이곳에 머물며 절을 중창할 때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청룡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산 이름을 서운산(瑞雲山)이라 고치고 절도 청룡사(靑龍寺)로 개명하였다. 부속암자로 은적암․내적암․서운암이 있는데 내원암은 48명의 강사가 계승된 유명한 강원이었다.
청룡사 대웅전(보물 824호)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자연석으로 축조한 기단에 화강암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이 기둥이 볼 만하다.
분명코 절 근처에서 자른 나무로 기둥을 썼는데 아예 치목(治木)은 도외시하였다. 생김생김 그대로 옆의 가지만 쳐내고 기둥으로 세웠으니 기둥마다 모양이 틀리다. 이는 이런 큰 건물을 지었을 도편수의 재주가 모자라서 자로 재고 다듬고 깎아내는 수고를 게을리 한 것이 아닐 터이다. 또한 특별히 자연미를 살리고 멋을 생각해서 이렇게 지은 것도 아닐 것이니, 자연스럽게 나무를 베고 다듬어 세웠을 뿐이건만 그것이 숲에 맞고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이 청룡사는 또한 사당패의 겨울나기 거처로도 널리 알려졌다. 청룡사 불당골에는 사당패들이 모여 추운 겨울을 보내며 기예를 익혔고 봄이 되면 골골을 누비며 외지로 나다녔던 곳이다.
이런 연유로 서설 『장길산』에도 청룡사 불당골이 등장하였으나 몇 채의 가옥이 남아 있던 불당골도 지금은 마을이 없어져서 산새와 들짐승의 거처가 되었다.
안성은 그 고을이 오래되고 사찰들도 역사가 쌓여 이곳 사람들의 불심도 또한 튼튼하다. 석남사, 기솔리의 상․하 미륵당, 대농리 미륵불, 여기 저기에 흩어진 석탑들이 안성 사람들의 불심을 굳게 이어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