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연 이야기] 인연 닿았던 몇 권의 책

나의 인연 이야기

2007-11-01     관리자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 애초에는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고자 하는 데에 있지 않았었다. 다만, 뭔가 심오한 철학이 담긴 듯한 불교를 조금이나마 알아서 좀더 유식한 사람이고자 하는 하나의 허영심 같은 것으로 출발을 했다.
요즘에는 여러 곳에서 스님이나 법사님들의 법문도 많기 때문에 생각만 있으면 들을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으나 그때만 해도 그렇지가 못해 내 재주로는 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이라 하더라도 요즘처럼 우리말로 된 책이 그리 많지도 않았으며 간혹 일본책 번역판이나 일본책들을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구해 볼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읽는 책들이 체계적이지를 못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답답해하면서도 단편적으로나마 조금씩 느껴져 오는 것을 즐기며 읽어 나갔다. 그렇게 읽어 나갔다고는 하나 많은 책들도 아닌 몇 권의 책밖에 되지 않았으면서도 그나마 나는 불교를 마치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다 높은 데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지에 와있는 것처럼 행세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니 자연 나는 불교에, 아니 불교뿐 아니라 어느 종교든 특정종교에 아주 빠져 버리는 것은 편협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결코 그 곳에 빠지지는 않으리라는 다짐을 스스로 굳게 해 가면서 읽어 갔다.
어느 코메디언이 한 말이 생각난다.
한국의 코메디 관객들은 웃지 않으려고 작정하고 버티면서 코메디를 관람하는 것 같다고….
나도 이 코메디 관객처럼 버티면서 불교에 접근해 간 것이다. 그러자니 불교를 좋아한다면서 절이나 스님들은 별로 가까이 해보지 못한 채 지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 버팀은 허물어져 가는 듯했다. 말하자면 웃기 시작한 코메디 관객이 된 셈이다. 절에도 더러 가보고 싶고, 스님도 뵙고 싶어졌으나, 그것도 부지런하지 못한 나에게는 잘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등산길에 절이 있으면 주인에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법당에 가서 일배만 하고 지나갔다. 삼배해야 하는 법당에 절도 아무도 가르쳐 주는 이가 없어 몰랐었다. 그것도 누가 보는 것이 쑥스러워서 겨우 해낼 지경이었다. 반배와 삼배의 예절을 알고 나서는 그대로 실천을 했으나 절을 하는 목적이 뚜렷하지 않아서인지 쑥스러움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고 스님을 뵙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아서인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 용기가 없어도 되고 부지런하지 않아도 되는 책읽기밖에는 별도리가 없었으나, 그것도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뒤져 가다 보니 점점 혼란스러워져 감을 느끼게 되었다.
‘부처’라는 개념도 분명해지지 않고. ‘불생불멸’과 ‘필생필멸’, ‘인연’과 ‘공(空)’등이 어지럽게 엉켜지던 참에 현암사에서 일본의 불서 몇 권이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고 몽땅 사서 탐독을 시작했다. 그때 그 몇 권의 책들로 혼란스러움에서 얼마나 헤어날 수 있었고, 다소 가닥이 잡히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런 불서들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사고 내지는 해석일 거라는 강한 의식 속에서 나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지키고자하는 버팀을 영 버릴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엄청난 건방진 일이었다. 그러더가 만난 책이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책이었다. ‘카프라’라는 현대물리학의 석학이 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다. 이 책이야말로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불경이나 관계서적들 중 내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이 되었다.
앞서 말한 주관이다 객관이다 하는 건방진 생각을 부수어 버리고 불교 그 자체가 주관과 객관을 떠난 절대적 진리임을 믿게 해 주었다.
이때부터 나는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불교란 좋고 나쁨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비록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믿을 수밖에 없는 궁극적 진리임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쉬움이 있었다면 유구한 불교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한 불자가 일본 사람이 쓴 글을 통해 생각을 정리해야 했고 또, 서양 사람이 쓴 책에서조차 불교의 종주국이 일본인 듯한 인상마저 주게 된 것은 못내 찜찜함이 가셔지지 않음을 사족을 붙여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