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참회도량` 원각사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탑골공원

2007-10-30     관리자

여름철의 한복판이라 무던히도 덥다 . 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순례하러 가는 길도 즐거움보다 짜증이 앞선다. 차라리 이런 날엔 집안에 가만히 앉아 문화재 관계 서적을 들춰보는 일이 교통체증을 감내하며 도시를 벗어나는 일보다 더 즐겁고 지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문화재를 보고 만지며 체험하는 느낌을 어찌 책에서 얻을 수 있으랴. 차분히 살펴 보면 이 도심속에도 찾아가서 꼭 보아야 할 만한 문화재들이 꽤나 많다. 그래,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선선한 바람을 쐬며 탑골 공원(파고다 공원)으로 가 보자.

파고다(pagoda)는 남방의 불교국가에서 쓰이는 말로 사리를 봉안한 탑을 가리킨다. 사리탑이 있었으니 파고다 공원이 되었고 일찍이 공원이 되었기에 3.1운동 당시 애국학생과 시민 모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신성한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원래 이 터에는 고려시대에 흥복사가 있었으나 조선이 개국하면서 관가의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다. 대웅전은 공부하는 유생들의 모임터로, 동쪽의 선방은 풍습을 관장하는 관습도감(慣習道監)으로,서쪽의 선방은 장례를 관장하는 예장도감(禮葬都監)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배불정책으로 사찰을 새로 창건할 수 없었고 다만 전통 사찰을 중수만 할 수 있었다. 또한 한양의 사대문 안에 있던 크고 작은 절들을 전부 혁파하여 자취를 감추게 하였으나 유일하게 세조(수양대군)가 세운 대가람이 도성안에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파고다 공원 자리에 있었던 원각사(圓覺寺)이다.
세조는 어린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후 불교에 진심으로 귀의하여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며 많은 공덕을 쌓으니 속리산의 정이품송, 오대산 상원사에 얽힌 전설이 모두 세조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불법을 신행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인연이 있다.
세조10년(1464년) 4월,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불법을 닦던 효령대군은 양주 회암사의 동쪽 언덕에 석가모니 사리를 안치하고 {원각경}을 강의하였는데 공중에서 여래가 모습을 나타내고 사리가 분신하여 800여 개로 늘어났다.
5월 2일에 효령대군은 사리를 세조에게 보이고 함원전에서 같이 예불하였는데 이 때 다시 사리가 분신하여 400여 개가 되었다. 세조는 이 기적을 경험하고 전국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5월 3일에는 흥복사터를 둘러보고 원각사를 창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에도 사리가 빛을 발하는 방광이 여러 번 보임에 따라 그 때마다 죄인을 방면하였다.
그 다음해인 1465년 사월 초파일에는 낙성회를 열고 이해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원각경언해]본을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스님 2만 명을 초청하였다. 원각사를 세우기 시작한 지 3년후인 1467년에 10층 석탑이 완성되자 사월 초파일에 연등회를 베풀고 탑을 낙성하였다. 물론 석탑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분신사리와 [원각경언해 ] 본을 봉안 하였는데 이 뒤에도 이 절의 사리가 방광하거나 분신하는 이적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1488년(성종 19년)에 원각사는 화재로 인하여 불타게 되고 아름답던 탑도 거센 불길의 피해를 입었다. 성종은 이 절이 선왕이 창건한 절이라 하여 다시 중수하였으나 그 다음의 왕인 연산군 때에 이르러 페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연산군은 이 절을 기생방으로 바꾸어 놀이터로 삼았고 연산군이 폐위되자 그에 의해 집을 헐린 사람들에게 이 원각사를 철거하여 그 재목을 나누어주니 이때가 중종7년, 1512년이었다.
이때 세조가 만든 원각사 대종은 절이 헐린 이후 남대문에 걸려있다가 다시 종로의 보신각에 걸리게 되니 이 종이 바로 보물 2호인 보신각의 종이다. 그후로 한 개의 탑과 한 개의 비가 그 자리에 남아 원각사터임을 증언하여 왔으니 탑은 바로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이요, 비는 보물3호인 원각사비이다.
원각사지 10층석탑은 그 재질이 대리석이다. 우리나라 탑이 거개가 화강암인데 이 탑과 경천사지 10층석탑(국보86호), 신륵사 다층석탑(보물225호)등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귀한 탑이다.
특히 원각사지 10층석탑은 고려시대때 만들어진 경천사지10층석탑(현재 경복궁 전통공예관 앞뜰에 있다)을 본뜬 탑으로 수려하고 섬세한 기교는 우리 탑의 역사에서 머리에 두어야 할 우수작이다.
기단부는 3층으로 되었는데 1층에는 용, 사자, 모란, 연꽃 무늬를 새겼고 2층에는 인물, 짐승, 초목, 궁전을 3층에는 나한과 신선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1층부터 3층까지는 기단부와 마찬가지로 亞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4층 부터는 사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옥개석은 각 층마다 팔작지붕을 하였는데 특히 3층은 이중의 지붕으로 되어 있어 놀라움을 더하게 한다
지붕의 기왓골,공포,석가래,기둥,난간 등 목조건축의 따뜻하고 섬세한 맛을 그대로 돌 위에 살려 놓았으니 사리탑과 부도탑에서 뛰어난 역량을 드러내었던 고려시대 석공의 맥이 아직은 살아 있음을 느껴볼 수 있다.
탑신의 각 면에서 부처님이 설법하였던 12회의 법회장에 모인 불.보살.천인상을 조각하고 그 편액에 다보회(多寶會).영산회(靈山會)등을 새겨넣어 경전에 근거한 불탑임을 밝히고 있다. .
원각사비는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인데 1471년(성종 2년)에 건립되었다.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성임,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이 비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마멸이 심하여 글자를 알아볼 수 없으나 그 비문이[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려있어 원각사의 내력을 일러준다 . 뚜껑돌인 이수는 없으나 비석의 윗부분에 네 마리 용을 조각하였고 그 아랫부분의 전액은 강희맹의 글씨이다.
거북이가 연잎을 지고 있는 모양의 귀부는 약간 둔한 느낌을 주는 탓으로 패기와 열정이 부족한 듯 느껴진다. 아마도 국가의 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뀜에 따라 불법에 대한 신심도 엷어지고 불사가 곧 수행이라는 석공들의 정열도 식어진 탓에 이렇듯 기력이 없는 거북이가 되지않았나 싶다.
이 탑에도 6.25라는 민족상잔의 상처가 남아 그 몸에 여러군데의 총탄자국을 안고 있다.
이와 같이 파고다 공원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불탑의 터이다. 비록 역사의 중간에 허리가 잘리웠어도 3.1운동 때 다시 살아나 우리 민족의 성지가 되었다. 500년 이상을 그 자리에 있으면서 성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이 탑과 비, 그를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속에 어찌 온갖 감회가 오락가락 하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