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편품(方便品)제2

법화경 강의(14)

2007-10-30     관리자


경문
76. 부처님은 스스로 대승에 머무시고 그 얻은 바 법과 같이 해서 정과 혜의 힘으로 장엄하여 이것으로 중생을 제도함이니 스스로는 위없는 도(道)인 대승과 평등법을 증득하고도 만약 소승법으로써 한 사람이라도 교화했다면 이는 간탐에 떨어지리니 이 일은 옳지 못하리라.
77. 만약 어떤 이가 부처믿고 귀의하면 여래는 속이지 않으며 간탐이나 질투의 뜻도 없느니라. 모든 법 가운데서 악을 끊었으므로 이 까닭에 부처님은 시방에서 홀로 두려울 바가 없느니라.
78. 나는 상(相)으로 몸을 장엄하고 광명으로 세간을 비추므로 무량한 중생에게 존경받을 새 이는 참말씀(實相印)을 설하기 때문이니라.
79. 사리불아, 마땅히 알라.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은 일체의 중생들이 나와 다름이 없게 함이라. 옛날 내가 소원했던 것이 지금에 이미 만족하였으니 일체중생을 교화하여서 다 불도에 들게 함이었느니라.
80. 만약 내가 중생을 만나면 다 불도로서 가르치건만 지혜없는 자들은 잘못 알고 미혹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느니라.

 강의
이 방편품은 방편에 대한 내용들인데, 부처님께선 왜 이런 방편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느냐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 어둡고 지혜없고 미혹하고……. 일률적으로 못났을 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으로 못났기에 온갖 방편을 다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석고 못나고 우매하고 미련한 그러한 중생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이런 많은 방편을 베풀어 눈뜨게 해주고자 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래의 경문들은 제가 몹시 좋아하는 대목입니다만, 부처님의 넉넉한 자비가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경문
나는 아노라. 이런 중생들은 일찍이 착한 근본 닦지 않고 오욕에 굳게 집착하여서 어리석음과 애착으로 번뇌를 내며 모든 욕망의 인연으로서 삼악도에 떨어지며 육도중에 윤회하여 온갖 고초를 두루 받으며.

 강의
흔히 불교에서는 삼악도와 육도윤회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를 몹시 궁금하게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지장경에 나오는 전설적인 것들은 물론 상징적이긴 하지만 그런 지옥의 형태가 그대로 존재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또 아귀라는 것도 경에서 설명되어진 액면 그대로의 아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나 지옥같은 인생살이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편안히 경전공부를 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지옥 같은 삶을, 지옥 같은 시간을 많이 겪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아수라 같은 인생도 내 주위에서 얼마든지 보고 듣는 바이고 내 자신도 경우에 따라서는 아수라 같은 인생를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24시간, 365일 늘 그런 것은 아니로되 어느 한 순간이라도 아수라 같은 인생을 늘 접하고 있습니다. 또한 축생 같은 인생, 천상 같은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천상세계와 극락세계가 경전에 아주 호화찬란하게 그려져 있지만 우리 상식으로는 그런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극락 같은 인생도 얼마든지 있고, 천상 같은 삶도 지옥같은 삶을 사는 과정에서 가끔씩은 맛보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얼마든지 간단하게 육도윤회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전에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저 천상에 있는 하늘세계가, 신선의 세계가 정말 있다한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요는 경전에 담겨져 있는 오묘한 의미들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를 못해서 사실은 우리의 생활상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되겠지요.

경문
태중에서 작은 형상을 받아 세세에 고통이 점점 불어나고 덕이 없고 복이 없는 사람되어 온갖 고통에 시달리며 삿된 소견의 숲속에 들어가서 혹은 있다 혹은 없다는 등의 이러한 여러 견해를 의지하여 62가지 잘못된 소견을 가지며 허망한 법에 깊이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고 굳게 지키며 아만으로 스스로를 높게하고 아첨과 마음굽어 불성실하며 천만억의 오랜 세월동안에도 부처 이름조차 듣지 못하고 또한 바른법도 듣지 못하니 이같은 이를 제도하기 어려우니라.

 강의
낡은 옷은 벗어버려야 새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새옷을 입어야겠다고 하면서 낡은 옷을 안 벗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의 사상, 생각, 다른 사람에 대한 소견들도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서 자꾸 새롭게 새롭게 발전하려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가진 생각에 대해서는 굳게 잡고는 버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라도 자기 생각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문
81. 이 까닭에 사리불아, 내가 그들을 위해 방편을 베풀어서 모든 고(苦)가 다한 길을 설하여 열반으로써 보이니 내 비록 열반을 설했으나 이 또한 참된 멸도가 아니니라.
82. 모든 법은 본래로부터 항상 스스로가 적멸한 모습이니 불자가 이런 도를 행한다면 내세에 부처를 이루리라. 위해 사구게(四句偈)는 법화경에서 중요시 되는 사구게입니다. 또한 이것은 시식할 재의 끝부분에 영가를 떠나보낼 때 하는 마지막 게송인 것입니다.
제법(諸法)이란 지금 말하는 나, 말하는 대상, 여러분의 육신과 정신세계, 우리가 의지하는 건물과 땅덩이 공간과 시간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제법은 항상 본래부터 스스로 적멸한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진짜 열반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현상은 적멸상이 아니고 온갖 차별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적멸상이란 온갖 차별상이 다 사라져버린 실제의 모습이며 차별상의 본체(本體)가 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은, 우리 인식으로 이해되어지는 모든 것들이 차별상이라면, 이 인식되어지는 세계의 본체(주체․모체․실상)는 적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멸상은 통일되어 있고 여러 가지 상이 아닌 하나인 것입니다. 부처나 우리나 적멸상의 입장에선 하나이나 차별상이 되었을 때는 부처가 있고 내가 있고, 너가 있고 내가 있고, 남녀가 있고 동서가 있지만 적멸상에는 동서, 남녀, 부처와 중생이 없는 본래의 모습 그 자리가 바로 적멸상입니다. 그러기에 윗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차별된 현상인 제법은 본래부처, 근본을 본질을 따져서 보니까 적멸상이라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이러한 도를 행한다면(적멸상의 이치를 실천한다면), 적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즉시 부처가 된다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적멸상, 우리 생명의 실상, 제법의 본체를 깨닫는 그 순간 그대로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란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닫는 분이니까 그렇습니다.

경문
83. 내가 방편력이 있어서 삼승법을 열어 보였으나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다 일승도를 설하시느니라. 지금의 이 모든 대중들은 마땅히 모든 의혹을 다 제거하라. 제불의 말씀은 다름이 없어서 오직 일승이고 이승은 없느니라.
84. 과거의 무수한 겁에 한량없이 성불한 부처님들은 백천만억 가지로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이와같은 여러 세존께서는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수없는 방편력으로써 모든 법상(法相, 이치)들을 설명하셨으니 이 모든 세존들께서도 다 일승법을 설하시어 무량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불도에 들어가게 하셨느니라.

 강의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란 깨달음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와 관계된 모든 것들은 그 시원(始原)이 깨달음에서 나온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은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지금까지 펼쳐온 법화경 경문들의 내용도 간추리면 이런 뜻을 펴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삼승을 열어 보였지만 결국은 일승도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에서 목탁․요령․염주․죽비․경전 등이 나왔지만 이것들은 결국에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도구이듯이 여러 수만 가지의 삼승도 일승에서 나왔고 종래엔 일불승으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어떤 불교행위든지 간에 이 원칙만 안다면 잘못 헤매일 염려는 없는 것입니다.

경문
85. 또한 모든 큰 성인인 부처님은 일체세간에 있는 천상, 인간의 여러 중생들의 깊은 마음속 욕망을 아시고 다시 다른 방편으로써 제일의 뜻을 나타내게 하심이라.
86. 만약 어떤 중생들이 과거 여러 부처님들을 만나서 법문을 듣고 보시를 하며 혹은 지계와 인욕과 정진․선정․지혜 등으로 가지가지 복과 지혜를 닦으면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다 불도를성취했느니라. 모든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 사람들 마음이 착하고 부드러우면 이와 같은 중생들도 이미 다 불도를 성취했느니라.
87. 모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사리에 공양하는 사람이 만억 가지의 탑을 세우되 금과 은과 파리와 자거와 마노와 매괴와 유리 구슬로써 훌륭하게 널리 꾸미어 모든 탑을 장엄하며 혹은 돌로 된 탑묘를 세우되 전단향과 침수향나무와 목밀과 그 밖의 다른 재목과 벽돌․기와․진흙 등으로 꾸미며 만약 넓은 들판에 흙을 쌓아 부처님 탑묘를 세우거나 내지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들어도 이와 같은 사람들은 다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88.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위해 여러 형상을 건립하며 여러 가지 상호들을 새기면 다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89. 혹은 칠보로써 만들거나 놋쇠와 적동․백동과 백납과 아연․주석과 쇠붙이․나무․진흙으로 만들며 혹은 아교로 칠한 베로써 불상을 장식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다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90. 채색으로 불상을 그리되 백복이 장엄된 형상으로 자기가 그리거나 남을 시켜도 이미 다 불도를 이뤘느니라.
91. 심지어 아이들이 장난으로 풀과 나무와 연필이나 혹은 손가락이나 손톱으로 부처님을 그렸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은 점점 공덕을 쌓아가서 대자비심을 구족하게 되어 이미 불도를 다 이루었고 오직 보살들을 교화하여서 무량중생을 제도하였느니라.
92. 만약 어떤 사람이 탑묘와 부처님 상과 탱화에 꽃과 향과 번개로서 경건히 공양하거나 만약 사람을 시켜 음악을 하되 북을 치고 소라를 불며 퉁소․피리․해금 공후와 비파․징․요령과 이같은 갖가지 묘음으로써 다 고르게 공양올리며 혹은 즐거운 마음으로 부처님 공덕을 노래하는데 비록 작은 소리였을지라도 다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강의
이상으로 볼 때, 삼귀의 노래를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서 조그맣게 모기소리를 냈더라도 이미 성불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자비와 관용과 아량과 그 수용하는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편들은 부처님이 온갖 방편을 다 기울여서 한 중생도 놓치지 않고 다 성불하도록 하는 자비심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