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전시회, 그리고 출가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도조가 이호종

2007-10-30     관리자

중견 도조가(도자기 조각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이호종(45세) 씨가 이번 전시회(1992년 12월 21일~30일 갤러리 타임)를 마지막으로 출가의 길을 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라는 제목하에 전시된 이번 작품전이 그의 마지막 전시회가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원시 상형문자와 닮은 형상들이 몇 조각의 평면들 위로 부조처럼 드러나는 평면작품은 간결한 양식적 아름다움, 고도의 절제된 정신성 등을 보여주며, 원초적인 것, 근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흙과 석고에 톱밥을 섞어 불에 구워낸 그의 작품은 어찌 보면 원시 동굴 속의 상형문자 같기도하고 또 어찌 보면 절제된 선화(禪畵)같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양(陽)의 기운이 너무 거셉니다. 모든 것이 밖으로 밖으로 분출하려고 해요. 이것이 음화(陰化)되지 않으면 안 되요. 그 작업의 일환으로 고대 벽화나 고대적 분위기를 차용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작품제목에서도 알겠지만 저의 모든 작품의 모토는 모든 것은 관계속에 있다는 불교의 연기관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고정적인 늘 함은 없다. 다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임을 보다󰡑󰡐고정된 개체는 없다. 다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관계성일 뿐이다.….󰡑
이와 같은 작품의 제목 속에서도 그의 작품의 기저가 되고 있는 것이 연기(緣起)의 법칙임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존재의 실상을 어느 정도는 들여다 보고 있는 듯 싶기도 하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삶은 결코 즐거움이 아니고 고통임을 그는 자각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욕망과 갈애(渴愛), 집착에 있음을 그는 본다. 이처럼 모든 것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분명히 알아차리면 고통의 소멸을 위한 지혜는 분명히 열릴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안다.
󰡒예술은 결국 완전한 행복의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리고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의 그림자일 뿐, 물(物)자체는 분명 아닙니다. 즉 상징은 명칭, 관념 개념일 뿐이지 즉물(卽物)은 아닙니다.󰡓
이호종 씨가 많고 많은 길 가운데 예술을 택했고 그 가운데 미술을 택한 것은 그나마 그것만이 최고의 자유를 보장해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즈음 그 행위로서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진정한 욕망의 소멸에 의해 얻어지는 자유는 출가수행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그는 그의 미술활동을 마감하고 출가의 삶을 택한 것이다.
그가 미술활동을 하면서 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 것󰡑에 대한 것이었다. 온통 서양 교육의 이입으로 비롯된 서구사상의 맹점을 발견한 그는 주로 동양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유가․노장․주자학… 등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불교와 접하게 되었다. 불교는 그에게 거대한 우주와 같았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같았다. 그는 불교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한편, 누님(부산 경성대 무용과 교수)의 영향으로 화두선(話頭禪)을 공부하기도 했다.
누님을 통해서 송담 스님을 친견하고 ‘이뭐꼬’ 화두를 받아 화두를 참구했다. 그러면서 경기도 마석읍 수동면 내방리 안방골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작업장에서 출가수행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경행과 좌선을 하고 불단에 예불을 올리고 작업을 하는 일을 계속했다. 10여년 간의 일이다. 눈물겹도록 치열하게 화두를 잡았지만 공부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끊임없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근기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남방선인 위빠싸나 수행을 하시는 거해 스님을 만나고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91년 6월에는 거해 스님과 함께 22일간 인도를 비롯해 태국 네팔을 성지순례하면서 막연하게 출가해보고 싶다는 그 동안의 생각이 현실화되었다. ‘바로 이 길이다. 이 길만이 최상의 길이다’는 확신과 함께 출가를 결심했다.
그는 이번 작품전시회를 마지막으로 남방불교의 최고 메카로 알려지고 있는 미얀마의 판디트라마 명상쎈타로 출가를 한다. 미얀마 최고의 선지식으로 추앙받고 있는 그곳의 우판디타 스님의 인가를 이미 받았고 그 문하에 들어갈 것이다.
그의 인생도반이며 수행도반인 그의 부인 (부천공업전문대 교수, 산업디자인)과 아들(국민학교 5학년) 또한 함께 출가하고 싶지만 아직은 여건상 그렇게하지 못하고 우선은 이번 설을 쇠는 대로 혼자 미얀마로 떠날 것이다.
그는 부처님 말씀대로 빠르면 7일 늦어도 7년 안에는 위빠싸나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궁극적인 자유는 욕망의 제거, 완벽한 무아(無我) 상태에서만 가능하지요. 삼법인(三法印)을 훤히 들여다봐야 해요. 삶의 구조적 고통의 원인인 욕망․갈애․집착을 소멸해가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작가 행위, 일상적인 삶으로는 무한한 자유자재­열반을 얻을 수 없어요. 소유․명예․욕망의 행위에 불과했던 작가행위와 일상적인 삶을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지요.”
그가 다시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깨달음을 얻은 다음의 일일 것이다. 작품활동 자체가 깨달음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때는 작품을 계속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마지막 전시회 전시장에서 본 그의 표정과 말과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단호했다. 투명한 보석을 보는 듯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4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얻은 뚜렷한 결론, 금강석과도 같은 굳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