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다

선의 고전/종문무고(宗門武庫) (12)

2007-10-29     관리자

협산 인(夾山 璘)1)과 석상 임(石霜 琳)2)은 오랫동안 불일 재(佛日 才)선사에게 의지하였다.
불일에게서 떠나온 후에는 함께 상강(上江)을 행각하다 황룡에 이르러, 남 화상(南和尙:黃龍慧南)이 법좌에 올라 소참(小參) 법문을 설하는 것을 보았는데, 임(琳)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여 결국 입실(入室)하여 남화상의 제자가 되고, 인(璘)은 그를 노하게 하여 마침내 한 방망이를 때리고 떠나버렸다.
임(琳)은 나중에 크게 깨달아 기봉(機鋒)이 빼어났는데, 무릇 법을 설하는 것이 자못 진정(眞淨) 화상과 견줄 만하였다.
그러나 진정 화상과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여서, 석상(石霜)에 머물 때 송(頌)을 지어 중에게 전하도록 하여 진정을 뵙게 되었다.
그 송의 뒷 구절은 이런 것이었다.
천하를 왔다갔다 하며
선을 참구하는 자가
신풍3)에 이르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네.
도생(道生)과 승조(僧肇)와 도융(道融)과 도예(道叡)는 구마라습 법사의 큰 제자들로서, 사의보살(四依菩薩)4)이라고 불리었다.
일찍이 라습과 함께 󰡔유마경󰡕을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에 이르러 모두 붓을 놓고 말았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 경계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논의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한 구절도 손대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장자론(李長子論)」5) 인 경우에는 화엄법계(華嚴法界)에 들어가서 문장을 나누고 글귀를 해석했던 것이니, 환하기가 태양과 같아서 아무 의심도 없었던 것이었다.
만일 직접 요연(了緣)6)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선주(宣州)의 명적 정(明寂 珵)선사는 선배 존숙들을 두루 친견하였는데, 낭야(瑯琊) · 설두(雪竇) · 천의(天衣) 같은 분들을 모두 받들고 법을 물었다.
세상에 나와서는 흥교사(興敎寺) 탄(坦) 화상의 법을 이었는데, 탄은 낭야의 법을 이은 분으로 나중에 태평주(太平州) 서죽(瑞竹)으로 옮겨 서당(西堂)에 물러가 살았다.
스님[大慧]께서 처음에 사방을 행각하시다, 그에게 설두 화상의 ‘염고송고(拈古頌古)’7)에 대해 설해줄 것을 청하였다.
정(珵)은 공안들을 간하게 하여 모두 스스로 보고 스스로 설하게 하고 언어에 따라가지 않게 하니, 이로 하여 스님께서 선성(先聖)들의 깊은 뜻을 통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중에게 “고(杲: 大慧의 이름)는 반드시 옛 성인이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하고 칭찬한 적도 있었다.
다시 정주(郢洲)의 대양(大陽)에 행각하며 원수좌(元首座)와 동산 미(洞山 微)화상과 견수좌(堅首座)를 만나보았다.
미(微) 화상은 부용(芙蓉) 선사 회상의 수중(首衆)이었고, 견(堅)은 10여 년 동안 시자를 살았던 이였다.
스님께서는 세 화상 곁에서 매우 오랫동안 지내면서 조동(曹洞)의 종지를 모두 얻었다. 법을 전하고 받을 때는 언제나 향으로 팔을 태우며 함부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님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선(禪)이 주고 받을 것이 있는 것이라면 어찌 불조의 스스로 얻고 스스로 깨닫는 법이라 하겠는가”하고 생각하고는, 이를 포기하고 담당(湛堂)화상에게 의지하였다.
하루는 담당이 물었다.
“네 콧구멍이 어찌하여 오늘은 반쪽밖에 없느냐?”
“보봉(寶峰 : 眞淨)의 회하에 남겨 두었습니다.”
“멍청한 수좌로군!”
또, 하루는 시왕(十王)8)을 새로 단장하는 곳에서 물었다.
“이 관인(官人)들의 성은 누구신가?”
“양(梁)씨9)입니다.”
그러자 담당이 “성이 양씨인데 두건이 없는 것 웬일이지?”하며, 손으로 스스로 머리를 어루만졌다.
“비록 두건은 없더라도 콧구멍이 비슷합니다.”
“멍청한 놈!”
또, 경을 읽고 있는데 물었다.
“무슨 경을 보고 있는가?”
“󰡔금강경󰡕입니다.”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어찌하여 운거산은 높고 묘봉은 낮은가?”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제는 좌주(座主: 강사)가 되었어야 했네.”
어느날은 이렇게 물었다.
“고(杲) 상좌여, 자네는 나의 이곳의 선을 한꺼번에 깨달아서, 자네에게 연설하게 하면 어엿히 연설하였고, 자네에게 고인의 공안에 대해 염제(拈提)나 송(頌)을 지어 소참(小參)에 대중에게 널리 설하게 하면 자네는 또한 당당히 해냈네. 다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는데, 자네는 알고 있는가?”
“무슨 일입니까?”
“자네는 다만 이 한 가지, 와(囮)10)하는 한 소리를 아는 것만이 부족하네. 만일 자네가 이 한 가지 일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방장에서 자네에게서 선을 설할 때는 곧 선이 있다가 방장에서 나가기만 하면 금방 없어지고 말며, 또렷또렷이 생각할 때는 곧 선이 있다가 잠들기만 하면 또 금방 없어지고 마네. 만일에 이와 같다면 어떻게 생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제가 의심하는 점입니다.”
나중에 담당(湛堂)이 깊은 병이 들게 되자 스님께서 여쭈었다.
“화상께서 만일 이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신다면 저에게 누구에게 의지하여 이 큰 일을 마칠 수 있게 하시겠습니까?”
“원오(圓悟)라는 자가 있다는데, 나도 또한 그를 잘 알지 못한다. 자네가 만일 그를 만난다면 반드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수행하다 내생에도 다시 태어나 선을 참구하라.”

보령 용(保寧 勇) 선사는 사명(四明) 사람이다. 처음에 옷을 바꾸어 입고11) 설두 현(雪竇 顯)선사에게 의지하여 도를 물으니, 설두가 “앙상좌주(央庠座主)”12)로군!“ 하고 꾸짖었다.
용(勇)은 뜻밖에 당당한 기백이 그제서야 충만하여 좌복을 던져버리고 산을 내려와 설두산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고 서원하기를, “내가 금생에 사방을 행각하며 선을 참구하여, 도가 만일 설두보다 못한다면 기필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하였다.
용은 장사(長沙)의 운개산에 이르러 양기 회(楊岐 會) 화상을 참견하였다. 화상은 백운 단(白雲 端) 화상과 형제간이었다.
나중에 세상에 나와서는 보령산(保寧山)에 머물며 그의 도가 총림을 진동했으니, 과연 그의 뜻ㄹ과 같이 되었다.
성실한 사람의 기백이라면 어찌 본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전 황룡[先 黃龍]의 소산주(所山主)13)는 도량을 새로 건립하면서 낱낱이 총림의 격식에 맞게 하였다.
어떤 자가 “화상은 선을 알지도 못하면서 뭣하러 이렇게 하시는지·····”하고 비웃으니, 용(龍)이 “저절로 선을 설하는 자가 올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서 도량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적취 남(積翠 南) 선사를 청하여 주지를 맡아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나중에 전 황룡이 죽자, 남(南) 선사가 어느 날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바라건대 화상의 탑을 돌보아주소서”하는 꿈을 꾸었다.
남 선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방장에 앉아있는데, 또 얼마전에 꿈에서 본 사람이 나타나 “제가 탑을 돌보고 싶습니다”하였다.
남(南)이 꾸짖으니, 결국에는 “교대하는 사람이 올 것입니다”하더니, 얼마후에 과연 흙으로 빚은 사람이 왔다.
남 선사는 따로 토지신(土地神)을 만들게 하고 전의 토지신을 옮겨 전 황룡의 탑을 돌보게 하였다.

‘큰 혹부리’14)는 촉(蜀)의 스님이었는데, 평소에 불법이 혼란하여 이견이 벌떼갈이 일어나는 것을 한탄하며 “내가 선을 참구하여 만일 올바른 지견을 얻게 된다면 반드시 구업(口業)을 아끼지 않고 가만있지 않으리라”하더니, 결국 마조(馬祖) 화상의 탑에 발원하고 예하기를 수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 탑에서 백광(白光)을 놓는 것을 보고 홀연히 깨닫고는, 후에 총림에 이르는 데마다 노숙(老宿)들을 시험하였다.
설두산 앞을 지나가다 “이 늙은이는 입속의 물이 매끄럽지!”하고 말하니, 설두가 그 말을 듣고는 매우 불쾌해 하였다.
그러나 ‘혹부리’가 설두를 만나보니, 두(竇)가 “자네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하고 물었다.
‘혹부리’는 “노장님은 과연 입 속의 물이 매끄럽군요!”하고는 좌구를 던지고 나가버렸다.
직세(直歲)15)가 불쾌하게 여겨 중도에 시켜 ‘혹부리’를 구타하여 한쪽 발을 상하게 하였다.
‘혹부리’는 “이것은 설두 늙은이가 시킨 짓이다. 나중에 반드시 한쪽 발을 분질러 앙갚음을 할테다”하더니, 나중에 과연 그 말처럼 되었다.
‘혹부리’는 나중에 도회로 가서 저자거리에 마음 내키는대로 쏘다녔다. 어떤 관인이 집으로 모셔 공양을 올리겠다고 청하였다. ‘혹부리’는 누차 사양했지만 관인은 억지로 그를 머물게 하며 더욱 예경을 올리고 늘 시첩(侍妾)을 시켜 그의 앞에 음식을 바쳤다.
하루는 우연히 관인이 오자 ‘혹부리’는 일부러 그의 첩을 범하였다. 관인은 이로 인하여 공경의 예를 바꾸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곁을 떠날 수 있었다.
며칠 되지 않아 시끄러운 저자 가운데서 단정히 앉아 죽었다.

1) 夾山 靈泉 自齡선사라고도 한다.
2) 天衣 懷의 제자. 文祖선사라고도 한다. 泐潭 과 新豊에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웠다‘하였다.
3) 眞淨이 법을 펴던 곳.<五燈會元>에 ‘···화장하여
4) 학덕을 겸비하여 세인이 귀의하고 의지할 만한 이를 말한다.
五品位와 十信位를 얻은 자를 初依보살, 十住를 二依, 十行과 十回向을 三依, 十地와 等覺位를 얻은 보살을 四依보살이라 한다.
5) ‘이장자론’은 󰡔화엄경󰡕 ‘통현장자론’을 말함.
이통현은 唐의 왕족으로, 나이 마흔에 內典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오대산을 여행하다 어떤 神僧을 만나 󰡔화엄경󰡕의 대의를 가르침 받은 적이 있었다. 開元8년[730]에 죽었다. 나이는 96세였다.
6) 간접적인 인연을 말한 주2)에서 말한 神僧을 만난 사실을 말한 것인 듯함.
7) 고인의 공안 100則을 뽑아 거기에 拈提하고 頌을 붙였음
8) 명부전에 모신 시왕을 말함. 제1진광대왕, 제2초강대왕 등.
9) <會元>에 ‘湛堂은 興元府사람으로 성은 양씨다’ 하였다.
10) 와(囮)!는 배끄는 소리, 또는 아이들이 술래잡기하다 술래를 찾았을 때 내는 소리.
확철대오를 표현하는 말임.
11) 보령은 본시 天台敎를 공부하였던 분이었으므로 ‘옷을 바꾸어 입고’하고 말한 것이다.
12) 央庠은 용모나 위의가 산만하고 기백이 없다는 뜻. 央庠座主는 학문만 있었지 禪定力이 없는 중을 경멸하는 투로 하는 말.
13) 전기 미상.
14) ‘큰 혹부리’는 별명인 듯함. 전기 미상.
15) 禪寺의 소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