香火의 인연

보리수 그늘

2007-10-29     관리자

  고향 C군의 군지{郡誌} 편찬자료를 위해 지명조사를 하러 몇 년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땅 이름이란 바로 그 땅의 역사와 배경, 그 지형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으로 오랜 세월  조상들이 불러 왔던 명칭이다. 그러므로 땅 이름은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깎이고 닳으며 변하였으나 본래 지녔던 그 뜻은 영롱하게 빛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불리어진 곳이 우선 많다. [지피실]은 짚은 [깊은의 사투리] 골짜기이기 때문이고, [알맷등]은 산등성이가 알매 [말 안장의 경상도 사투리]처럼 생겨 불려졌고, 달이{月山}는 뒷산이 달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여기에 풍수지리설이 가미되면 상당히 동양철학적인 의미의 땅 이름으로 된다. 계팔{桂八}이란 동리는 뒷산과 앞산의 능선이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형국으로 8마디가 있다 하여 처음엔 제팔{梯八}이라 했다 하였는데 어느 풍수장이가 앞산 능선과 8봉우리를 보니 8명의 대과급 제자가 난다 하여 후에 계팔{桂八}로 개칭했다는 그럴 듯한 유래도 있다.

  마을 형태가 많은 군사를 거느린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라서 둔산동{屯山洞}이고, 뒷산의 맥이 끊어져서 절산[節山,切山}이다. 산형이 용처럼 생겨 머리부분은 용산{龍山} 윗부분은 상룡{上龍} 등부분은 용배{龍背}이고, 산이 알의 생김새로 마산{馬山}이고, 그 말머리는 마수동{馬首洞}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곳곳이 명당이고 삼재팔난을 피할 수 있는 파난처라 주장한다. 왕거래이{王居]는 산들이 왕거미가 그물을 짜는 형국{??結網穴}의 명당이라서 임진란과 6,25때  피난하였던 곳이라 사람들은 대대로 살아왔다며 그 사실을 믿는다. 전설이 스며든 땅도  많지만 역사를 말해주는 땅 이름이 또한 많다. 옹기를 구웠던 곳은 그 흔적이 없으나 점터{店村}라 불리어지고 서원이나 원{院}이 있었으면 원동{院} 교리{校里}, 성{城}이 있는 곳은 잣뫼{城山}, 구리광산이 있었으면 퉁점이{鋼店}, 쇠를 판 곳은 씨끼미{金谷}, 도둑이 들끊었던 곳이나 산은 도론골{ 盜論골ㅡ論里}, 도덕봉{도둑봉ㅡ道德峰}, 과거에 급제하여 [화짓대]를 세워서 화짓대걸, 조선시대 창고가 있었으므로 창아[倉谷}이다.

  이렇듯 대추밭 고개, 바깥담, 바람재, 자래덤, 아래담, 쪼글새미, 활끝, 버들밭굼, ,,,등등 우리 말의 진수가 담겨있는 아름다운 이름들이 흙속에 파묻혀 오늘을  지키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이 불지{佛地}가 아니랴만 특히 불교와 관련 있는 땅 이름이 많아서 새삼스레 통일 신라시대 부터의 전통을 더욱 느끼게 한다. 지금도 40여 곳의 사찰이 있고 유명한 절터로 기록된 것도 20여 곳이 있는 이곳 C군은 이야말로 골짜기마다 불교의 인연이 깊었다.

  대표적인 불교 설화의 골짜기로 연당{蓮塘}, 운봉{雲峰}, 대산{垈山} 3개 리는 온통 불교와 연관된 땅 이름으로 가득하다. 이곳은 신라시대 때에 경주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용흥사, 대건사, 연화사 등 팔방구암자{八房九庵子}가 있었다 한다. 여기로 들어오는 고개가 두 곳 있는데 모두 중고개{승고개}라 불리고, 산은 부처님이 계시는 연화봉{蓮花,蓮華峰}, 낮은 들은 부처님이 계시는 연당{蓮塘}, 연평{蓮坪}, 남쪽 마을과 산은 사바세계와 인연을 끊는 구름처럼 둘러쳤다 하여 운봉{雲峰}, 계곡에 큰 바위가 있는데 용흥사와 대건사 등으로 가는 스님이 옷을 벗어 속세의 먼지를 이곳에서 털고 입산 하였다 하여 불의대{佛衣臺}라 부르는가 하면 가장 깊은 골 동리는 안심{安新}리, 그보다 더 깊은 안골짜기는 월명{月明}이라 하여 불심으로 삼재팔난을 면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어디 이뿐인가? 절이 있었던 골짜기가 군내{郡內} 수십 개소에 있어 불땅골{佛堂谷}, 절터 굼티기, 절골{寺谷}, 절논골,,,,,등등 절의 이름은 잊혀졌지만 그 역사는 살아있다. 또 미륵부처가 있었다 하여 미륵이 부처골도 여러 곳 있고 절소유의 들이었다 하여 절앞들, 절의 동리라 하여 사촌[寺村}이라 불렸던 것이 이제는 사리[舍里}가 되기도 했다. 탑이 있었던 곳은 탑골, 일미암{一味庵}이란 암자가 있었다 하여 일미골이란 동리도 있다.

  사찰의 흥망을 이렇듯 땅 이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고려말의 중, 신돈{辛돈}의 생장지라 하여 불태워진 옥천사{玉泉寺}의 터와 일대의 대소 사찰들의 폐허가 그냥 남아 있고, 또 빈대가 많아서 절이 망했다거나 양반의 세도에 밀려 쇠퇴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임진란 때 의병과 승병의 근거지가 되었기에 왜병의 방화로 없어졌다는 보림사와 보광사가 있다. 다시 재건되지 못했으니 아쉽기만 하다.

  여러 시대가 흐른 지금 그 옛날 흥했던 자취만을 억새풀 속 주춧돌에서 찾을 뿐이나 옛 선인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으니,  더욱 이 땅이 향화{香火]의 인연으로는 으뜸이라고 느껴졌다.

  (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