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이 심히 깊은 미묘법이여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 불모(佛母) 박정자

2007-10-29     관리자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부처님께서 저에게 이 길을 걷도록 인도해 주신 것 같아요. 제가 불화공부를 하기 이전에 동양화와 서예, 초상화를 그린 것도 저를 불모(佛母)로 만들기 위한 부처님의 뜻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날이 더하고 해가 거듭할수록 부처님 인연법의 심심미묘함을 느낍니다.”
탱화(幢畵)그리는 사람을 부처님을 낳는다고 해서 불모(佛母)라고 부른다. 주로 총림(叢林) 안에서 사자상속(師資相續)되어온 불모의 역할은 청정비구가 그동안 담당해왔다. 불교의 깊은 뜻을 터득해야할뿐더러 평생의 수행없이는 좋은 불화를 그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부처님을 그려 모시는 일이기 때문에 여성금기로 되어왔다. 그런데 연암(蓮巖) 박정자(48세)씨는 이 두터운 전통의 벽을 깨고 마침내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丹靑匠)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지난 ‘86년 제11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머리칼보다 가는 세필(細筆)에 금니(金泥)를 묻혀 그린 ’금니부모은중경병(金泥父母恩重經屛)‘으로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기도 한 박정자 씨.
그는 3남 1녀의 자녀를 둔 평범한 주부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솜씨가 있었던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 섰다가 여기(餘技)로 서화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만봉(萬奉) 화상의 불화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했다.
그것이 197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의 일이다. 문하생을 자청하고 찾아간 그를 스님께선 별로 눈여겨 보시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보고 싶으면 1주일 후에 오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만 해도 탱화는 스님, 혹은 남자들이 해야할 일이라 믿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뜻을 가진 이 분들도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달을 하고 도중하차 하기가 일수였으니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다 알다시피 불화공부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십왕초 천왕초 여래초를 방바닥에 엎드려서 수천 장씩 그려야 한다. 똑같은 일을 하루 종일 수없이 반복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초공부만 10년 이상을 해야 비로소 탱화를 조성할 수 있으니 과히 끈기와 인내가 없으면 될 수 없는 일이다.
일주일 후에 오라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다음날 바로 찾아간 그는 불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다시 간청했다. 이렇게 시작된 불화공부는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가정주부로서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불화를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불심 깊은 시어머님께서 이해해주시고 가정일을 도맡아 해주셨다.
아침 먹고 봉원사 만봉화실에 가면 저녁 늦은 시간에야 돌아오곤 했다. 10년 간을 매일 그렇게 했다. 스승인 만봉 스님께서 그때야 비로소 그를 눈여겨보시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 장려상, 특별상을 받고 마침내는 최고의 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불화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주신 시어머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그린 부모은중경 병풍으로였다.
“불화는 다른 그림과 달라서 그리고 싶다고 해서 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려지지 않는 것도 아니지요.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려집니다.”
때로는 자신이 그려 모신 탱화이지만 그 탱화속 불보살님의 미소를 대하면 자신 스스로도 법열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매일 새벽이면 부처님전에 예불을 올리고, 탱화를 그리기 전에는 반드시 불단 앞에 예를 올린 후 붓을 잡는다. 그의 문하에 있는 20여 명의 문하생 또한 마찬가지다. 부처님전에 기도정진하며 늘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불경 속의 불모가 되지 않고는 좋은 불화를 그릴 수 없는 까닭이다. 보는 이들에게 환희심을 주고 거룩하고 성스러움을 주기 위해 그는 일필일배(一筆一拜)의 신심으로 정성을 다해 가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경복궁에 있는 전승공예관에서 자신이 그려 모신 불화 183점을 전시했다. 20여 일 간의 전시기간 동안 5~6번 찾아오신 분도 계셨다. ‘이것이 바로 환희장 세계가 아니겠느냐’ ‘불보살님의 화현이라’며 많은 분들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 또한 그의 보람이 되었다.
좋은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작품을 선뜻 내주기도 하는 박정자 씨는 나환자촌 건립, 장애자올림픽, 청주 결핵요양원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승보공경회 기금마련을 위한 전시회에도 동참, 많은 분들이 원불(願佛)로 그의 탱화를 모셔갔다.
“이 분야에는 여성으로서 제가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많은 여성불자들이 불화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려불화를 보면 아름답고 섬세합니다. 자비스러움이 넘쳐나요. 이런 면에서보면 오히려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공부하기에 더욱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이 일을 하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는 내생엔 동자승으로서 이 일을 계속해가고 싶다고 말한다. 청정비구의 몸으로 그린 불화를 부처님 전에 올리고 싶은 것이다.
“물이 그릇에 의하지 않고는 전해질 수 없듯이 감사하는 마음은 언어에 의해 전해지지요. 그런데 제 경우는 부처님께 향한 저의 마음이 불화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제가 그려모신 탱화를 친견한 공덕으로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자비와 지혜의 눈을 떠서 세상을 보다 밝고 아름답게 보고 그렇게 생활한다면 그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전남 나주가 고향인 그는 그의 고향에 탱화박물관을 세울 예정이다. 시아버님의 절터로 잡아놓으신 그곳에 탱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을 조성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그림으로 표현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그것이 바로 포교가 아니겠느냐며 그는 웃는다.
그리고 또 한가지 원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부처님의 씨앗을 심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그 탱화박물관에서 어린이법회도 이끌고자 한다. 어린이법회에 대한 자료도 채곡채곡 챙겨가는 그의 가슴엔 늘 환희심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큰 원을 세우면 그에 따르는 에너지는 반드시 생기는 것이며, 그 원은 꼭 결과로서 열매맺게 된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에서 그것이 진짜 소나무인 줄 안 새가 부딪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잘 그려모신 신중탱화에서는 서기가 방광한다고 한다. 이를 본 큰스님이 그 탱화앞에 절을 하자 그 탱화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불모 박경자 씨는 이런 불화를 그려 모시고자 한다. 마치 불보살님이 살아서 우리에게 생명감을 주고 그대로 감화를 줄 수 있게 하는 그런 불화를 남기고 싶은 것이다. 마치 수행승처럼 차분하고도 정적이면서 한치의 흐뜨러짐 없는 그는 오늘도 부처님 전에 절하며 붓을 든다. 영원히 변치않는 부처님을 그려모시기 위해서. 이것만이 부처님의 가피력에 감사하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회향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다.
내년 봄쯤이면 그는 그의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진짜 부처님 그늘에 살며 부처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박정자
1945년 전남 나주 출생
광주사범학교 졸업후 교사직 8년
‘71년 인간문화재 만봉 스님 문하 입문,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상전 입상
민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 장려상, 특별상, 대통령상 수상, 금니(金泥) 가사탱화 국립박물관 소장
‘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후보 지정, 88 그후 인간문화재 전승공예대전 출품 및 찬조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