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같은 소리

보리수그늘

2007-10-29     관리자

  봄이 왔다고 살판이나 난 것처럼, 인기가수와 탈렌트라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등장시켜,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이 연출한 봄맞이 특집 대형 TV쇼라는 것을 잠깐 보았다. 겨울 내내 움추리고 착 가라앉아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고 좀 더 생동적인 계절 감각을 느끼게 해 보자는 방송국 측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너무나 안이한 제작 태도에 비싼 시청료가 더욱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봄을 맞는 축제는 그런 외형적인 것만은 아닐 텐데 라는 의문이 뒤따르면서 말이다.

  기상대에서 날마다 분석되는 축척 천오백만 분의 일, 지상 일기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봄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 뚜렷한 특징은 차고 메마른 시베리아의 공기 덩어리가 천천히 위축되면서 여러 덩어리의 작은 고기압으로 나누어지는 반면에 겨울동안  저만큼 물러났던 북태평양 고기압이 슬며시 제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기도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해서 과연 우리 곁에, 우리의 마음 속에도 봄다운 봄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의 어느 시인은 사람들이 봄이 왔다기에 그 봄을 찾으려 하루 종일 산과 들을 헤매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나무가지에 그 봄이 와 있음을 알았다는 시를 짓고 있다.

  서양의 동화 가운데는 봄이 아닌 행복을 찾아 헤맨 두 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따뜻한 봄날 창가에 무료하게 앉아 있던 형제는 행복이라 상징되는 파랑새를 찾으려 집을 떠난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행복의 파랑새는 없다. 고생과 실의에 빠진 형제는 피로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전처럼 창가에 앉아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의 파랑새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골몰한다. 그때 머리 위에서 아름답고 맑은 새소리가 들린다. 눈길을 드니 형제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행복의 파랑새가 바로 그들의 집 창문 앞 나무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고 싶다. 신라 때 큰스님인 원효 스님이 구법하기 위해 당나라에 가던 중산속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한밤중에 무척 갈증을 느끼고 물을 찾았다. 한 곳에 이르니 옹달샘에 물이고여 있고 그 옆에 바가지까지 놓여 있었다. 원효 스님은 반갑게 그 바가지로 물을 떠서 감로수보다 더 욱 달고 맛있게 물을 마셨다. 이튼날 아침 잠에서 깬 원효 스님은 간밤의 그 물맛을 생각하고 다시 그 옹달샘에 갔더니 파헤친 웅덩이였고 바가지는 사람의 두개골이었다. 뱃속의 것을 모두 토해낸 원효 스님은 어제밤에 그처럼 달게 마셨던 물이 오늘 이처럼 더럽게 느껴지다니 웬일일까? 골똘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이 모든 것이 마음의 변화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 나중에 큰스님이 되셨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물의 변화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계절의 변화에는 물론이고 하찮은 유행에 까지도 반응한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노하는 것이 모두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의 일시적인 변모 뿐이고 본질은 아무 것도 변할 것이 없는 데도 말이다.

  다시 봄 이야기를 해보자. 진달래 개나리 피고 먼 들녘에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연인의 옷차림이 나비처럼 가벼워졌다고 해서 정말 우리 곁에 봄은 온 것일까? 아니다, 아무리 계절이 봄이라고 해도 이 계절을 봄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봄은 정녕 봄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봄이나 행복은 모두 주관적인 의미를 지니며 마음가짐에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모두 마음을 텅 비워 놓고 이 봄이 정말 봄다웁게 춥고 음산한 겨울같은 편견이나 아집, 이기가 우리를 얽매고 있지 않는지 조용히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 [그 친구, 부처님 같은 소리 하시네.] 라는 빈정거림이 들리는 것같다. 내가 과민한 탓인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