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신디 이야기(2)

독자의 글

2007-10-28     관리자


결석 수술을 한 그 다음해부터 다리에 조그만 혹이 생기더니, 점점 커져 탁구공 만해져서 걸을 때 불편해 하였다. 다시 서울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다행히도 양성종양이었다. 부분마취만 하고 수술을 하여 완쾌되었다. 우리 신디는 평생 동안 목걸이나 목끈은 매어 본 적이 없다. 한 생명을 그런 도구로 얽어맨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신디를 기르면서 모든 것을 신디편에서 생각하여 되도록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우리가 신디에게 해주어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 식구들은 여름이 되어도 식구 모두가 피서를 가본 적이 없다. 신디가 멀미를 하여 같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교대로 다녀와야 했다. 신디를 기르다 보니 동물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각별해져서 길을 가다가도 고통받는 동물들을 보면 하루 종일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내생에도 축생도를 벗어나서 인도환생하여 부처님 법 공부하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곤 하였다.
가을이 되어 하늘에 잠자리가 날아다니게 되면 잠자리 가방 속에 있는 잠자리들을 어린이 스스로가 놓아주도록 이해시키는 일을 되풀이하곤 한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최소한 불자들만이라고 어릴 적부터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워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가 아무리 예뻐해주고 사랑한다고 해도 신디가 스스로 축생보를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저녁기도를 할 때마다 옆에서 자고 있는 신디에게 내생에는 인도환생하여 부처님 법을 공부하라고 기도를 해주었다.
비록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신디는 경 읽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기도 덕분으로 신디의 발작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정도가 되었다. 너무나도 예뻐서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신디라는 이름 대신에 ‘귀염이’라 부르게 되었다.
귀염이는 간질병 때문에 새끼를 한번도 낳지 않았다. 본능을 임의대로 막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신디도 다른 강아지가 자기한테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신디는 혼자 있는 것도 싫어하여서 외출도 교대로 해야 했다.
하지만 50일 기도 때에는 혼자 집에 둘 수밖에 없어 늘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작년 겨울 50일 기도 때에도 귀염이는 혼자 집에 있어야만 했다. 어떤 때는 문을 열고 들어와도 모르고 곤히 자곤 하였다. 그때는 귀염이가 워낙 잠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몸이 안 좋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가슴이 아프다.
기도가 끝난 날부터 귀염이가 잘 먹지를 않았다. 이틀이 지나서는 물도 먹지를 못하여 다시 병원에 가서 원장선생님께 진찰을 받고 X-ray를 찍어 보니 뱃속에 암이 퍼져 있었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현대 의학으로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다고 하시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그래도 신디는 그렇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으니 행복했을 거라고 우리를 위로하셨다. 그날부터 우리들은 귀염이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부처님께 우리 귀염이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빨리 몸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귀염이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혈변을 보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하루 전날밤부터는 몸을 구르기까지 하였다. 통증이 너무 심하여 구르면서도 탈진하여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귀염이를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울면서 부처님께 매달렸다.
동짓날인 12월 22일 3시 30분. 귀염이는 옆으로 누워 기지개를 펴더니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여 귀염이는 만 15년의 강아지로서의 생을 거두었다.
우리는 정신없이 신디를 부르며 울다가 이렇게 울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바라밀교육을 받으면서 배운 연화부 의식대로 밤새워 기도를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부모님께서 올라 오셨다. 우리는 귀염이를 안고 보광사로 갔다. 스님께서는 위패를 써 봉안하고 기도를 해주셨다. 기도 후 절 뒷산 양지바른 언덕에 귀염이를 묻었다.
귀염이의 하늘색 곰무늬 이불을 깔고 광목에 싼 귀염이를 뉘었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얹고 흙을 덮었다. 그날부터 49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우리 귀염이가 불법인연 구족한 집안에 인도환생하여 부처님 법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지장보살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2주일이 지나 큰언니 꿈에 신디가 나타나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방생선원 스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일주일마다 육류는 빼고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 주라고 하셔서 차려 주었더니 그후로는 꿈에 보이지 않았다.
49일 기도가 끝나는 날은 신디가 좋아하던 음식과 사진을 가지고 가서 기도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귀염이가 없는 집은 텅 빈 것 같았다. 나갔다 들어오면 금방이라도 귀염이가 꼬리를 치며 나올 것만 같았다. 기도를 끝낸 후 9일째 되던 날 큰언니 꿈에 신디를 보았는데 금방 사내아이로 변하여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더란다. 허리에는 흰 광목끈이 묶여져서 길 건너 나무에 연결이 되어 언니가 아이를 안고 끈을 풀어 주면서 길을 건넜다고 한다.
사내아이는 위에 하늘색 소매없는 셔츠를 입고 남자아이 흰팬티를 입었는데 엉덩이 부분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하였다(신디가 죽은 후 광목에 뉘었을 때 항문을 막았던 솜을 새 솜으로 가는 사이 광목에 피가 한 방울 떨어졌었다).
꿈을 꾸고 난 후 방생선원 스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신디가 축생계를 벗어나서 인도환생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꿈이라고 하셨다. 하늘색 셔츠는 묻을 때 밑에 깔아준 하늘색 이불이고 흰팬티는 광목으로 몸을 싸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에게 자기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신디가 죽고나서 우리들은 신디 이름으로 법보시를 하고 소쩍새 마을에도 신디 이름으로 후원자가 되었다. 그 꿈을 꾸고 난 후 며칠 뒤에 큰언니가 다시 꿈을 꾸었다.
범어사라고 하는데 대웅전 맨 앞에 광덕 큰스님과 황금색 가사를 두르신 스님이 마주 앉아 계시고 양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며 그 가운데 보료 같은 방석에 화려한 동궁옷을 입은 아이가 와서 앉는데 주위 사람들이 광덕 큰스님의 양자라고 하면서 모두를 부러워하더란다.
그런데 그 아이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 조금 퉁명스럽게 쫑알거리는 꿈을 꾸었다. 우리는 그 꿈이 무슨 뜻인지 몰라 또 다시 성덕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범어사를 다시 확인하시더니 우리 신디가 속세에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에 태어나겠지만 본인은 스님이 되고 싶어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범어사에서 하는 금강계단 수계식 때 스님들께 대중공양을 하여 신디가 스님이 될 수 있는 인연을 지어 주라고 하셨다.
신디가 바라는 마지막 일도 해주고, 신디가 스님이 되어 언젠가는 우리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신디는 지금쯤 불심 깊은 집안에 태어나기 위해 태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디가 살아온 생을 돌이켜보면서 부처님의 인과법칙과 육도윤회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며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위신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번 우리 신디에게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신 과천 보광사 진영 스님, 미아리 방생선원 성덕 스님, 불광출판부 송암 스님과 서울대 수의과대학 성재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부처님 전에 두 손 모아 지심으로 감사드린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佛光

● 오정연: 경기도 성남시 신흥동 주공A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