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제자의 출가(出家)

이남덕 칼럼

2007-10-28     관리자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 있는 듯하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에 있어서도 특히 요즘 대학의 제도 속에서 학생 수는 많지만 아니 많기 때문에 오히려 참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옛날보다 더 얻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방선이와 나와의 만남. 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만남은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가 우리 국문과 학생이기는 했어도 당초에는 지극히 사무적인 이유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정년퇴임을 앞둔 몇 해 동안은 말하자면 교단생활 삼십 년의 마무리 작업으로 『어원연구』의 집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였다. 집필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출판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학교당국에서는 나를 도와줄 ‘근로학생’ 한 사람을 보내주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방선이가 바로 그 학생이었다. 내가 저를 택한 것도 아니고 제가 자발적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우리의 만남의 동기는 지극히 사무적이었지만 만남의 순간 나는 그에게서 너무나 자연스러움을 느꼈다.
수수한 차림, 순수한 모습은 그냥 그대로 고등학교 학생인데 일하는 데 있어서의 꼼꼼하고 착실함은 믿음직스러운 어른과 같았다.
우리는 서로 연구실 열쇠를 나누어 가지고 들락날락하며 함께 방에 있는 시간도 있지만 각자 따로따로 일거리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때로는 그의 친구들이 함께 있을 때도 있고, 또 누가 찾아와 같이 나가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에 그들이 소위 운동권학생인 것을 알게 되었으나 나는 그 문제만큼은 아는 척 할 수가 없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2년) 때 광주사건을 눈으로 직접 보고 몸소 겪은 소녀가 이제 서울로 올라 와서 대학 2학년이 되었으니, 이제 바야흐로 자아에 눈뜨기 시작한 나이에 그 사회비판의 눈이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나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회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평온할 날이 없기는 한가지라 하겠지만 ’87년 6․29선언이 나오기 전 몇 해 동안의 공기는 소위 5공비리의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때라 학원 안팎이 어수선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방선이가 며칠씩 연구실에 나타나지 않을 때는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걱정이 되었다.
한번은 가두시위에서 걸렸다가 풀려났다고 며칠 후에 나타나서 보고한 일도 있다. 말수 없고 침착한 사람이라 항상 여유를 느끼게 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기에 그만하기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후 경찰(보안당국)의 손은 학생 당사자보다도 그 가족들을 몹시 성가시게 했던 모양이다. 전남 시골에 홀어머니가 농사 지으며 사셨는데 날마다 경찰이 찾아와서 딸 문제로 어찌나 귀찮게 했던지 농사철 한창 바쁜 때에 일손 놓고 상경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딸을 설득하여 ‘결판을 내려고’ 찾아온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방선이의 언니가 교수실로 나를 찾아와 언니네 집으로 안내되어 가본즉 시골서 그 어머니가 상경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노심초사로 파김치가 된 모습이었다. 더 놀랐던 것은 방선이의 모습이었다. 늘 단발머리 귀여운 모습이 숙녀머리의 가발을 쓰고 있지 않은가! 설득을 하려는 어머니와 설득되지 않는 딸과, 어머니는 딸의 침묵 앞에서 펄펄 뛰게 되었고, 드디어 달려들어 가위로 그 머리를 다 깍아버린 것이다! 이래도 네가 밖으로 나다니며 그 짓을 할 것이냐?
나는 딴 방에 와서 방선이를 마주하니 딱한 마음에 가슴이 메었다. 앞으로 어떡할래?” 그의 대답인즉 ‘더 이상 언니네 폐를 끼칠 수가 없다.’고 했다. ‘친구들하고 자취하겠다.’는 대답에 더 가슴이 답답했다. 보나마나 운동권 학생들끼리의 공동생활이니 안전한 거처가 될 리 만무했다.
“언제라도 좋으니 우리집으로 오너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방선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나를 불러간 이유는 방선이보다도 어머니를 안위시키기 위하여 방선이를 설득시켜달라는 바람이었을텐데…. 언니네 집 계단을 내려오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방선이는 그 후 언니네 집을 나와서 친구들과 자취생활도 했고 또 공장에 (위장)취업해서 일 한 줄 알고 있었다. 학교는 휴학원을 내고 학교를 떠났다. 나도 그 다음해에 정년퇴직으로 학교를 떠났다.
우리가 학교를 떠난 뒤에도 가끔 소식은 친구편에 듣기도 하고 때로는 전화로 직접 알려 오기도 했다. 내가 서울을 떠나 이곳 말구리로 이사오던 날 아침, 마치 누가 알고 불러댄 것처럼 나를 찾아와서 이삿짐을 나르고 집 안팎 설겆이를 해 주었는데, 얼마나 일을 잘 했던지 그 날 왔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두고두고 기억할 정도였다.
6․29후에 그는 복학해서 학업을 마쳤으나 딸을 위해 속 태우던 어머니는 서울 다녀간 다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다.
어머니와 딸. 만일 이 두 모녀 사이의 사랑이 조금만 덜했다면 그토록 고통이 크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어머니가 생각하는 한 여자의 행복의 차원과 딸이 추구하는 ‘다수 민중의 행복’의 차원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비극이다.
내가 서울 나가는 일은 대개 주말에 절에 나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 후 그녀를 만나려면 불광사로 약속장소를 정하게 되어 그녀도 자연히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실 운동권 학생들의 ‘의식화’라는 작업은 행동이 주가 되고 독서범위는 사회문제에 대한 좁은 범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주위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그녀의 관심이 인간의 깊은 정신세계에까지 미치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불교에 대한 탐구가 날로 깊어감을 알 수 있었다.
지난 가을철부터 소식이 없더니 겨울을 지나고 불쑥 그가 말구리로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부산 절 선방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바로 들렀다는 것이다. 그대로 머리 깎으라고 만류하는데 나를 꼭 만나고 내려가려고 일부러 상경한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몇 해 전 그 어머니가 그녀의 머리를 깎았던 광경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출가(出家)는 금생의 결심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녀가 머물러 있던 3주일 동안 그녀는 자기 친어머니에게 못다한 효도를 대신 내게 하는 듯 싶었다. 부엌일은 도맡다시피 다하고 아침 예불에서 독경과 참선, 그리고 아직 눈 녹지 않은 죽엽산을 마음껏 걸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가 머물렀던 동안의 청정함이 되살아난다. 그가 추구하던 ‘민중의 행복’은 이제 더 ‘인간의 행복’으로 심화된 것이다. 우리가 사회 문제를 생각할 때도 어느 한 계층만을 강조하면 다른 계층은 대립적인 저편으로 밀어붙이기 쉽다.
온 누리가 하나이듯이 한 나라, 한 사회도 하나다. 모든 것이 크든 작든 하나의 몸이다.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 가르침에 수순하여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별할 수 있다. ‘이 길이 과연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는 사람과 ‘이 길이 옳은 길이냐 옳지 않은 길이냐’를 분간하는 두 가지다. 이번에도 그의 언니는 내게 동생의 출가를 막도록 설득해 주기를 은근히 바랬지만 방선이는 위의 두 길 중에서 후자에 속하는 유형이기에 아무도 무슨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이미 무수 전생에 많은 수업을 거치고 원력(願力)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 이런 보살(菩薩)들이 때와 장소에 따라서 독립투사도 되고 사회운동가도 되고 출가자(出家者), 즉 성직자도 되는 것이다.
운동권학생, 방선이가 가졌던 사회개혁의 열정은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으로 성장할 터전이었던 것이다. 그가 떠나는 날 눈길을 미끄러져 멀리 떠나는 차체를 향하여 그가 반드시 견성성불할 것을 심축하며 합장하였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