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인식을 우주론적 차원으로 확장

특집/가려뽑은 불교명시 4편 /김달진의 「씬냉이꽃」

2007-10-28     관리자

씬냉이꽃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新綠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宇宙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되고
나비 날은다.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1907~ )은 경남창원에서 출생하여, 1929년 「문예공론(文藝公論)」에 첫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시원(詩苑)」, 「시인부락(詩人部落)(1936)」동인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금강산 유점사에 입산하여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해방 후에는 하산하여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지난 30여년 동안 한국고승시문집을 비롯한 불경의 번역사업에 진력하였다.
그는 승려이며, 시인이교, 학자이며, 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세간에 나아가 세속의 일에 골몰하기보다는 세간에서 물러나 산간에서, 향리에서 그리고 서울에 올라온 후 에도 은둔생활을 계속하였다. 그가 너무 은둔하고 있었던 까닭에 한때 작고시인으로 생각되기도 할 정도 였다.
시인으로서 그의 시가 문제되는 것은 불교적이며 노장적 전통의 시 세계를 그가 잇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의 서구시에 압도되던 시절에 문단에 등단한 그가 평생을 지켜온 것은 동양적 정신세계이며, 거기에 서려 있는 시심일 것이다. 그가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시에 대한 연구도 별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그의 시가 정리되고 약간 논의된 것은 김달진 시전집1 「올빼미의 노래(1983)」 김달진 시전집2 「큰 연꽃 한송이 되기까지(1984)」에 이르러서이다.
이는 그가 첫시집 「청시(靑柿)(1940)」를 간행한지 40여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그 개인의 은둔적 기질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시가 지닌 특질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서구적 방법론에 의한 인식론적 접근으로 그의 시를 해석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六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微風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푸르다
―「靑柿」전문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서경시에 더 이상 무엇을 덧붙여 말할 것이 없는 것 같다. 인공의 손이 가해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뜰이 있고, 미풍이 지나가고, 흔들리는 가지와 짙푸른 잎새 속에는 익지 않은 감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입김이란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이 모든 풍경은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작은 뜰이야말로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이며, 이 중심에서 화자는 빛나는 유월의 꿈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익지 않은 푸른 열매가 있으므로, 그가 염원하는 목표는 더욱 기다려진다. 이 익지 않은 세계의 현상적 움직임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것이 김달진의 시가 머금고 있는 불교적 인식론이다. 김달진의 이와 같은 인식론이 우주적 차원으로 밀어올려진 시가 바로 「샘물」이다.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자나가고
조그만 샘물을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만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地球의 섬 우에 앉았다.
―「샘물」전문

조그만 샘물이 바다같이 넓어지고, 그 샘물을 응시하며 ‘동그란 地球의 섬’을 인식한 것은 단순한 자기발견이 아니라, 나를 통한 삼라만상의 인식이며 여기서 나아가 세계의 인식일 뿐만 아니라 이를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범아일여적 (梵我一如的)상상이다.
이 시는 앞에서 말한 「청시」에 비하여 작자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자연현상 그 자체보다는 자연을 응시함으로써 확대되는 세계의 드러냄이 바로 그것이다. 청시에 깊이 감춰져 있는 본질에 대한 직관이 그만큼 사변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달진의 시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샘물」보다는 「청시」일 것이다. 그러나, 「청시」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현상 속에 자신을 깊이 감추어 버림으로써 쉽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에 대한 직관 때문일 것이다.
「청시」에서 맛볼 수 있는 직관이 감성과 적절히 어울리며, 고고한 품격을 머금고 있는 시가 「추성(秋聲)이다.

처음으로 내어다 놓은 솜 이불
새로 바른 하얀 미닫이

얌전하게 타내리는 黃촛불 앞에
캐묵은 唐版 詩集을 對해 앉는다.
―「秋聲」전문

화자가 듣고 있는 ‘추성’은 정갈하고 고고하다. 더 이상의 설명이 부가되지 않더라도 솜이불과 미닫이와 당판 시집에서 우리는 신선한 감각은 물론 가을을 맞이하는 동서 고금의 많은 사람들의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들은 모두가 세속의 일에 골몰하는 범인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이다. 맑고 정갈하지만 정적인 삶의 인식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김달진의 대표작을 고른다면, 나는 「씬냉이꽃」을 들고 싶다. (p60전문 참조)
이 시의 1연과 2연은 서로 상반된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서로 분절시킨다면 별달리 새로운 것이 없는 세계 인식이다. 이 상반된 세계가 ‘그는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을 매개로 연결되면서 이 시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존재의 인식을 우주론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다른 사람들이 새봄이 와 산으로 바다로 놀러간다고 야단스럽게 법석을 벌이고 있는데, 이 시의 작자는 혼자 뜰을 거닐다가 다른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니 발견하였더라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은 씬냉이꽃을 본다. 씬냉이꽃은 한 개체로서의 인간의 존재는 물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하나의 초점이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온다는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연상시킨다. ‘지난 어느 날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펄 나는 것이 확실히 나비였다. 스스로 유쾌하여 자기가 장자인 것을 몰랐다. 그러나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자기는 틀림없이 장자였다.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꾼 것인가? 그러나 장자는 장자요, 나비는 나비로서 반드시 분간이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만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다(김달진 역 「莊子」48면). 만물의 변화를 떠올릴 때 김달진의 시적 인식은 ‘新綠철 놀이가는 사람들’과 ‘씬냉이 꽃을 바라보는 나’로 대비되며, 지금 여기에서가 문제될 때 그것은 ‘나비’로 연결된다.
‘장자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자인가’ 이와 같은 인식은 불교의 범아일여 자연인식일 뿐만 아니라 이는 그대로 노장(老莊)적 삶의 인식과도 통한다. 애써 꾸미지 않은 ‘무위자연’의 삶의 태도야말로 김달진 스스로가 일생동안 지켜온 삶이며 시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청시」에서의 푸른 잎새 속의 푸른 감이나, 「샘물」에서 동그란 지구 위의 섬에 앉는 화자나, 「추성」에서 캐묵은 당판 시집을 읽는 화자나, 「씬냉이꽃」에서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이 우주 속의 지금, 여기의 나 모두가 삶과 자연을 인식하는 독특한 정신적 세계로 일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김달진의 시는 60여년의 시작 생활을 통해 너무나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불교적이며 노장적인 동양의 철학적 세계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신적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이는 정치․윤리․교육․형법의 원리가 된 천명사상(天命思想)과는 다르다. 현실에 집착하는 천명사상의 반대명제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아니던가.
이렇게 본다면 김달진이 세간보다는 산간을 택하고 세속의 명성보다는 은둔의 길을 걸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시대가 혼탁해지고 사람들이 악착스러워질 때 그의 시가 지니는 맑고 깨끗한 세계는 더욱 빛나는 가치를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
한용운과 조지훈으로 이어지는 불교시의 정신사적 흐름과 더불어 신석정과 김달진으로 이어지는 불교세계 또한 탐구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