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부터 극락까지

2007-10-28     관리자


믿음은 삶의 주춧돌
삶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타고 가는 이 차가 목적지에 무사히 조착하리라는 믿음, 지금 먹고 있는 이 음식이 독이 안 되고 영양이 된다는 믿음, 함께 사는 남편의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믿음, 이렇듯 인간은 믿음 때문에 살 수 있고, 또한 살아있는 한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현실 속에서 믿음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내가 타거 있는 이 차의 운전기사를 믿지 못하고, 먹고 있는 이 음식을 믿지 못하고, 남편을 믿지 못하고, 더 나아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밟고 선 이 땅이 지진으로 가라앉지 않을까 염려한다면, 한시고 편안히 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사실들을 믿고 살아야 한다. 또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관습적으로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러한 믿음의 대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항상 변하고, 언젠가는 믿고 있는 자신도 변하고 사라져버릴 존재인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일체 만물이 무상(無上)하고, 실체가 없는 관계만이 존재하는 공(空)한 것임을 또한 믿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불교의 믿음이디.
그러나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행자가 방황하고, 공이라는 말의 애매함 때문에 부처님을 얼마나 욕되게 해 왔는지. 깨달음은 비록 불교 최고의 목표이기는 하나 2,500년 동안 깨달은 자가 그 얼마며, 그 도를 이 세상에 펼친 자 그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도 의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말씀 알기도 어렵거니와 삶 속에서 체득하여 실천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오늘도 일터에서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내일도 또 그 삶이라는 전쟁터로 가야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을 떨쳐버릴 수도 없고, 고매한 철학자도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는 더욱 믿음이 필요하다. 즉 부처님에게 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에 나를 완전히 맡기는 실천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삶은 향상되고 복덕이 증진되고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위신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는 깨달음이나 극락을 직접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믿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뇌의 늪 속에서 방황하는 불행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마치 밥 속에 영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굶고, 사랑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사랑을 버리고, 행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행복을 부정하는 사람과 같다.
현실을 살며 믿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믿지 않고 산다면, 고통을 안고 죽음을 기다리는 시한부 인간인 것이다.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종교적인 세계와 같이 주체적인 경험세계는 믿는자에게만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종교의 세계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자격조차 없다.

믿음과 업(業)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마음 작용이다. 작용은 불교 철학적으로 하나의 업(業)이다. 업에는 신업(身業) ․ 구업(口業) ․ 의업(意業)이 있는데, 믿는다는 마음 작용은 의업에 해당된다. 그런데 신업과 구업은 반드시 마음의 의지적인 작용 즉 의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의지가 따르지 않는 신체적 혹은 언어적인 동작은 운동이라고 하지 행위라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의지가 들어있지 않은 동작은 물리적 생리적인 움직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은 반드시 의지와 함께 일어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하므로 의지가 수반한 행위만이 선악이나 과보의 판단대상이 된다.
따라서 생사윤회나 선악의 과보 등은 모두가 의지 여하에 달려있다. 그래서 불교가 불교뿐만이 아니고, 모든 성숙한 종교는 물론 재판에서조차 동기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 즉 의업에 판단기준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의업인 마음작용이 중요하기는 해도, 불교 철학적으로는 신업과 구업에 의하여 업이 구체화되고 완성된다. 왜냐하면 의업은 그 작용이 끝난 다음 여세(餘勢) 즉 관습력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작용은 너무나 찰나적이기 때문에 관습력을 남길 시간과 공간을 갖지 못한다.
예를 들면, 누가 한번 착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여 그는 그 착한 마음이 관습력을 가져서 계속적으로 착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 착한 행동을 하겠다고 언약하는 구업을 지으면, 대중에 의해서 착한 행동이 강조되거나 악한 행동이 제지를 받듯이, 이것은 마치 보시를 하겠다는 의업만으로는 공덕이 증진되지 않고, 그 의업과 함께 몸과 입으로 직접 실행될 때 공덕이 증가 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만으로는 공덕을 기대할 수 없다. 믿음은 그 마음과 함께 임으로 구업을 짓고, 몸으로 신업을 지어야만 공덕이 비로소 증진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를,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건, 연기(緣起)의 세계로 보건, 내가 부처라고 생각하건 상관없이 믿음에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실천되지 않는 믿음이란 관념의 유희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믿음이 실천될 때, 전생의 악업은 소멸되고 내세에 선업을 쌓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고난을 전생의 업보니 사주팔자니 하는 운명론적 체념의 심경에는 우주적인 어떤 작용을(중국 철학적으로 氣)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의 잘못은 마음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대우주에 어떤 힘이 주체라면, 소우주인 나의 주체는 마음작용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의지적인 마음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이 있으면 운명에 끌려 다니지도 않을뿐더러 업도 운명도 없다.

믿음의 공덕
이상과 같은 믿음에 실천이 동반되었다면, 어떠한 공덕이 있을까? 더구나 불교는 절대자를 통해서 구원을 받거나 복을 받는 타력종교가 아니고, ‘깨달음의 종교’ ‘자각(自覺)’의 종교인데 무슨 공덕이 이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달음조차도 믿음으로부터 출발함을 알아야 한다. 「법화경」에서 설해지듯 “모든 법은 너무나 심오하고 미묘하여 오직 부처님들만이 알 수 있고, 그 밖의 사람들 심지어 보살들까지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이 견고한 자는 제외”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화엄경」에서도 “믿음이야말로 보살도의 근원이요, 공덕을 낳는 어머니요, 미망의 사슬을 끊고 무상(無上)의 길을 열어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항상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데에 출발점이 된다. 이것이 불교수행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생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뛰어나 두뇌도 아닌 어리석은 자는 부처님 말씀을 배우기도 어렵거니와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더욱이 겨우 믿음을 일으켜 부처님께 귀의하건만, 이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 인생인 것을, 그 사이의 고뇌는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통의 바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법화경(보문품)」에 설해져 있다. 여기에는 불에 타서 죽게 될 때, 물에 빠져 죽게 될 때, 사업에 실패한때 자식을 낳지 못할 때 등 현실적인 모든 고통 절망적인 상황에서 관세음보살을 한마음으로 믿으면 모든 위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고 한다.
믿음의 공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악업을 지은 중생일지라도 내세에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까지 한다. 「무량수경」에서는 비록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도, 또 아무리 어리석은 죄악중생이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진심으로 10번만 부르면 모든 생사의 죄가 엇어져서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한다. 한번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인간에게 얼마나 멋진 희망인가! 이와 같이 불교는 종파나 개인의 근기에 따라서 형태를 달리하고 있으나,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믿음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믿음은 살아가는 데에 현실적으로나 정신의학적으로도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더욱이 이 믿음이 종교적으로 승화(信仰)되고 언행으로 실천될 때(業), 깨달음에 이르고 모든 현세의 고난을 극복하고, 내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고통 받고 극락왕생 못한 사람이 있었던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현실은 고(苦)이며, 극락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여기에 대답할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