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기초교리강좌] 수행과 해탈 ․ 열반

2007-10-28     관리자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실 때 이론적인 면과 더불어 반드시 실천적인 면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해(解)와 행(行)이 함께 설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사성(四聲)제. 팔정도(八正道)와 이번에 말씀드릴 십업설(十業說)등은 실천적 교설중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겠습니다. 팔정도가 출세간적인 윤리로서 생사 괴로움을 멸해가는 수행법이라고 한다면 십업설은 기본적인 일반 사회윤리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원시교설에서는 이 십업설이 매우 중요하게 설해지고 있습니다.
「중아함경 권27」에서는 십업설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흑업에는 흑보가 백업에는 백보가 흑백업에는 흑백보가 따르고 불흑백업에는 보가 없다.”
선업에는 선과가 악업에는 악과가 따르는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업(無記業)에는 과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중아함경 권3」에 보면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에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에 받을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의지가 작용했을 때에는 무기(無記)가 아니고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선업에 대한 선과는 받고 싶어 하지만 악보는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악업에 대해서는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하면서 무기업으로 돌리려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특히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나쁜 행을 경계하기 위해 악업을 먼저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업중 대표적인 것이 십악업입니다. 그리고 십악업은 신(身) ․ 구(口) ․ 의(意)업으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의업입니다.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은 의업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업으로 짓는 탐 ․ 진 ․치가 번뇌 중에서도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번뇌라는 것입니다.
십악업의 반대가 십선업입니다. 그러나 나쁜 일 하지 않는 것만이 선업이라 할 수는 없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좀더 적극적인 면에서 선업을 설하고 계십니다.
살생에 대해 얘기하면 선업을 짓기 위해서는 살생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려주는 방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방생은 물고기의 방생의 폐단 때문에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방생의 참뜻이 살려져야 할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의 방생은 목숨을 살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의 목숨이나 짐승의 목숨이나 그것의 귀함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생 담에 보면 매에게 잡혀 먹히게 된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비둘기 대신 자신의 몸을 바치는 애기가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둘기와 똑같은 양만큼의 허벅지 살을 떼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신의 살을 떼어내도 비둘기 무게보다 적었습니다. 결국에는 부처님의 몸무게 전체와 비둘기의 무게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비둘기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방생은 이와 같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 방생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있어서도 몸이 죽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며,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을 때에도 몸이 죽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며,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을 때에도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의욕을 북돋아 주는 것도 방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살고자 라는 의욕을 북돋아 주거나, 남이 살고자 하는 의욕을 끊지 않는다거나, 남이 잘하려고 애쓰는 것을 비방하지 않는 것도 방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불투도(不偸盜)의 적극적인 선업은 보시(布施)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없어도 나누어 주고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공존의 원리만 철저히 터득하면 나누지어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보시행이기도 합니다. 불질적인 것은 나누어 주면 감소되니까 조금 인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누어주면 줄수록, 넓히면 넓힐수록 더욱 커지는 것이 이 마음입니다. 나누어 주려는 적극적인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나누면서 화기애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사음의 적극적인 선은 천정한 행인 범행(梵行)입니다. 불망어에 대해서는 성실어(誠實語)이고, 불양설은 화쟁어(和諍語), 불악구는 부드럽고 좋은 말을 하라는 유연어(柔連語)가 적극적인 선업이 되며, 불기어에 대해서는 실속 없는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욕을 부리지 않으려면 부정관(不淨觀)울 하라고 합니다. 색(色)이라든지 그 밖에 것들이 부정한 것임을 관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내지 않으려면 자비관을 하여 자비심을 내고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연관을 함으로써 어리석음과 관계되는 12연기의 무명을 없애라고 했습니다. 십악업 가운데 탐 ․ 진 ․치는 특히 끊기 어렵다고 하나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업설을 숙명론이나 통속적인 교화방편설 등으로 이해하는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불교업설의 목적은 현세의 괴로움을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극목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사성계급차별도 바로 이 업설의 정신에 의해 비판되었습니다.
“귀천은 업에 의한 것이지 종에 의한 것이 아니다.「잡아함경 20」”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오, 태어나면서 바라문리 되는 것도 아니오, 오로지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숫타니파아타 제136」”
그리하여 인간은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이 주창되었던 것 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업설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은 공업(共業)입니다. 개인만 잘하면, 혹은 자기만 정화하면 사회는 저절로 정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오탁악세는 공업으로 만들어진 세계이므로 공동의 힘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께서 주창하신 평등사상의 구현을 방해하고 남녀 불평등, 계층간의 차별을 두는 여러 제도는 우리 모두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므로 그러한 제도의 철폐는 함께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화엄경 세주 묘엄품」에 보면 부처님께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자 그 도량에 보현보살을 위시해서 많은 보살들과 수많은 세간의 주인들이 각기 권속들을 거느리고 모여 들었는데 거기에 모인 모든 대중들은 과거 전생부터 부처님을 모시고함께 수행한 공덕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근 공덕은 개개인이 짓기도 하지만 같이 짓기도 합니다. 이렇게 계속하여 선근공덕을 지어가다 보면 앞으로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용화세계를 이룩하시고 설법을 듣고 제도를 받을 수 있을 것 입니다.
원시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수행법중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서 37조도품이 있습니다.37조도품이란 열반을 이루기 위한, 도를 돕는 37가지 수행법으로서 4념처, 4정근, 4여의족, 5근, 5력, 7각지,8전도를 말합니다.
먼저 4념처란, 우리의 몸은 부정한 것이라고 관하는 관신부정(觀身不淨), 우리가 감수하는 것은 전부 고(苦)라고 고나하는 관수시고(觀受是苦), 우리의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는 관심무상(觀心無常), 제법에는 아(我)가 없다는 관법무아(灌法無我)를 말합니다.
네가지 부지런히 행해야 할 사정근(四正勤)은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하지 않게 하고, 이미 생기지 않은 악은 없어지게 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하게 하고, 이미 생한 선은 증장케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자재한 네 가지 신통력인 사여의족(四如意足)과 5가지 보리에 도달하는 방법인 오근(五根)과 오력, 보리를 얻는 더 도움이 되는 수행방법이라 하여 칠보리분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칠각지와 이미 설명한 바 있는 팔정도가 이에 속합니다.
이상과 같은 모든 수행을 통해서 도달하는 궁극적인 경지가 곧 해탈과 열반입니다. 해탈과 열반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해탈은 번뇌의 속박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모든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유, 해방이 곧 해탈입니다.
「잡아함경 권18」에서는 “오온을 여실하게 아는 까닭에 오온에 불착(不着)한다. 오온에 불착하는 까닭에 해탈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열반이란 “탐욕이 영진(榮進)하고 치암(痴喑)이 영진한 것이니, 일체 번뇌가 영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고 했으며, “제행이 무상하니 이것은 생별하는 법이다. 생멸하는 생멸법이 멸해서 없어지면 적멸이 낙이 된다.「잡아함경 권22」”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 게송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설산동자로서 고행하실 장시 나찰에서 얻어 들은 게송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생멸이 멸해서 열반에 들면 열반사덕(涅槃四德)인 상 ․락 ․아 ․정(常 ․樂․我․淨)에 이릅니다. 일체 만법이 무상하지 않고 항상하며, 일체가 고가 아니고 낙이며, 제법이 무아가아니라 아인 상태며, 일체 모든 법은 염이 아니라 정의 세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열반에 이르지 못하였을 때에는 일체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였는데 일체가 상락아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열반의 상태에 이르면 세계관이 바뀌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약동하여 정의 상태가 되는 것을 열반이라 이릅니다.
열반 가운데 특히 완전한 열반을 반열반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생은 이미 다 했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나의 할 바는 다했으니 나는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불수후유란 생사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잡아함경 권15」에서 반열반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함이란 어떤 것이다. 노병사를 염리(厭離)하고 욕심을 버리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잘 해탈하면 이것을 이르되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을 얻었다고 한다.”
큰스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우리는 열반하셨다. 혹은 입적(入寂)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적멸(寂滅)의 경지를 말합니다. 번뇌를 일으킬 몸조차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