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한국불교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불교, 무엇을 할 것인가

2007-10-26     관리자

좌담 : 일타 스님(해인사 율주), 운학 스님(동국대 교수), 박경훈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사회 : 광덕 스님(본지 발행인)

장소 : 월간 불광 사무실

일시 1979년 10월 19일

󰊱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어야
불교는 우리 민족에게 문명의 아침을 가져왔다. 그러한 힘은 1600년의 우리 불교사 속에서 굴곡은 있어 때때로 장애을 받기는 했으나 의연히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600년의 불교사가 우리 역사와 함께 하면서 문화의 근간을 이루어 온 전통이 오늘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오늘의 불교는 역사적 현실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이 가능한가?
이러한 의문은 실제로 역사와 전통을 운위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제기되는 문제임에도 그것을 굳이 강조하고 나서는 것은 사명감을 무겁게 하기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한국불교가 과거의 환상 속에 산다고 한다. 비젼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문화유산이 많다든가 하는 것은 조상이 자랑해야 할 것들이지 결코 오늘의 불교도가 자랑할 거리가 못됨에도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의 불교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이것은 한국불교가 과거와 현실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닌가 한다.
전통을 계승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을 자랑하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오늘에 재창조하여 내일로 이어지게 하여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면 오늘의 불교도의 사명은 자명한 것이다.

󰊲 스님에 대한 다양한 기능의 요청과 그 절대수 부족
무엇을 할 것인가에 앞서 우리는 우선 발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한다고 하는 것은 과거나 미래에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곧 여기에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딛고 선 자리의 상황을 통찰함으로서 내딛는 그 걸음걸이의 정오(正誤)를 판별하여 바른 걸음걸이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적인 한 예로 사암(寺庵)의 현실을 들어 보기로 한다.
산중의 많은 사암은 비어 있는데 도시나 그 주변에는 사암이 늘고 있는 이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시로 인구가 집중하는 이유의 하나가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그러한 점과 유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간다. 이것은 산중의 사찰에서는 수도하기가 어렵다는 단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한편 옛날의 스님들이 깊은 산중에 칩거하면서 하던 수행이 지양되고 있는 경향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부정적이지만 후자의 경우에 따른다면 좋은 의미로 불교가 현대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 어떤 변혁을 하고 있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의 승려들은 옛날과 같이 개인적 수도 일변도의 생활에서 벗어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오늘의 승려는 안팎으로 바빠졌지만 그 활동의 의미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 적응하여 참여한다는 입장에서 어떤 평가가 있어야 한다. 이 점은 뒤에 역사가 결정적인 평가를 하겠지만 산중의 사암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두고 승려의 수가 모자란다는 점은 시인해야 할 것 같다. 활동 분야는 넓어지고 다양해진 그만큼 늘어난 수요에 공급이 따르지 못하는 현상은 여기에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성직자가 되겠다고 하는 희망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현대 산업사회의 한 추세라고 할 수 있는데 불교계에도 차츰 영향이 오고 있다면 이것은 승려의 교육과 양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 시급한 승려의 자질향상
도시나 도시주변에 들어서고 있는 많은 사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최근 행정당국에 의해서 도시주변 산간의 무허가 건축물이 철거되면서 거기에 해당되는 많은 사암이 철거되기는 했으나 이들 대부분 사설(私設) 사암이 생긴 원인과 활동 상에는 많은 문제들이 복합되어 있는 것이다. 기복(祈福) 성행하는 세태(世態)를 따라 우후죽순처럼 생긴 사설사암의 대부분은 조잡한 건축물 안에 조잡한 불상과 무속(巫俗)의 예배대상을 함께 안치하고 이름은 절이지만 실제로는 불교의 이름 밑에서 무속적인 미신 행위를 하고 있는 것도 없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정통교단이 적지 않은 책임을 느껴야 할 일인 것이다. 그 책임이란 교화사업과 통제가 골고루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나 그 주변에 세워지고 있는 사암 중 우수한 교화도량이 있기는 하나 그 수와 활동은 아직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다양하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대응하거나 도시인의 생활저변에 불법을 홍포하기 위한 포교사와 합당한 방법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실정이다. 도시만이 아니고 농어촌을 대상으로도 같은 실정이다.
찾아오는 이를 상대하는 교화활동이 지금도 주가 되어 있다. 교화할 대상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교화활동을 지향해야 하고 그것은 승려 스스로가 신도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고 교화해야할 대중사회와의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야별 전문가의 양성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돈독한 수행을 쌓고 승려의 본분 위에서 그런 일들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대사회적인 승려의 위치를 끌어올리고 승려의 자질을 높인다.

󰊴 계율을 생활에서 살려내야
승려와 신도를 막론하고 불교도는 불법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해야하며 그러한 생활은 계율에 의해서 지켜지고 향상한다. 흔히 부처님 당시에 제정된 계율은 비현실적이므로 개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여기에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계율의 비현실성과 낙후성으로 인하여불교의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서는 계율의 두 가지 면을 고려해 둘 때 그러한 주장은 한 면만을 치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계율은 지켜서 공덕이 되는 계목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자의 경우만을 취할 때 비현실적인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경우라도 계목을 제정한 정신이 악을 행하지 않는데 있고 보면 계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주장은 달라지게 된다. 부처님 당시 계율이 제정된 상황과는 지금의 하늘 땅만큼 달라서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하는 생각만으로 일률적으로 계율의 개정을 주장하는 것은 교각살우의 우려가 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떤 계목은 장애가 되고 어떤 계목은 지킬 수도 없고 지켜봐야 의미가 없는 경우 개폐하는 것이 옳다고 하지만 이것은 전혀 개인의 문제라고 본다. 예를 들어서 군법사가 군의 특별한 목적 아래서 법사활동을 하는데 계율 때문에 캐리어가 위축되거나 장애를 받는다면 그것은 개인의 능력문제인 것이다. 한편 실천함으로서 공덕이 이루어지는 계목 즉 십선계(十善戒)등은 계율 때문에 불교의 사회성이 낙후하다고 하는 주장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그러한 주장은 불교의 대사회적 활동이 적은 것을 계율 탓으로 돌리는 인상만을 준다. 오히려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계율의 일상화(日常化)운동의 전개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최소한 재일(齋日)을 지키는 관습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 의식의 대중화와 음악개척
구태의연한 것은 계율이 아니라 의식이다. 아직도 한문으로 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의식의 내용을 알지 못한채 의식에 참여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승려가 의식의 내용을 알고서 집전하고 있는가도 문제이다. 의식이 맹목적으로 집전되고 참여하는 오늘의 불교계는 의식주의에 떨어진 경향은 없는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불교를 표방하고 행해지는 무속적 미신행위가 성행하는 원인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의 내용을 모른채 한문으로 행해지는 한 의식예문(儀式禮文)은 주문화(呪文化)된다 따라서 의식예문이 우리말화 할 것이 시급하다.
의식예문의 우리말 번역과 동시에 우리 의식예문 속에 들어 있는 중국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도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의식의 신성성(神聖性)은 유지되면서 의식의 대중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의식의 대중화를 위해서 최근 음악의 도입이 시도되고는 있으나 아직 음악과 의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실정이다. 그러한 조화를 위해서도 의식예문의 번역은 선행되어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서양에서 시작한 음악을 가리킨다. 의식에 음악을 도입하는 일은 불교의식 음악인 범패의 의식을 현대화 대중화하면서 그 속에서 전승 발전시키는 일 만큼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다. 의식예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그것을 범패의 가락에 맞추어 의식을 집행하는 일도 시도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어쨌든 음악이 의식에 도입되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이 좋아야 할 것은 물론이며 불교를 주제로 해야한다. 가사는 불교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곡이 교회음악을 모방하는 일은 최소한 없어야 한다.

󰊶 대중에 접근해야 할 문서포교
의식예문의 번역과 함께 시급한 것은 경전의 번역을 비롯한 문서포교와 전파매체를 통한 대중포교이다. 전파매체는 우리에게 시설이 없고 전파를 돈으로 사는 방법뿐이어서 재원을 필요로 한다. 전파매체에 대한 제도적인 고려가 있다면 재원조달의 어려움은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는 실력을 불교계는 가지고 있다고 본다.
경전의 번역사업은 전에 비해 훨씬 활발하게 추진되고는 있지만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만 하지 못한 실정에 있다. 불교서적의 독서층이 넓어지고 있는 경향에 비해서 불교서적의 간행은 미미하고 독서의욕을 앞서서 계도하는 출판활동은 전무한 상태이다. 불교교단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자주성의 확립문제
오늘날 한국불교에 있어 문제 삼아야 할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불교교단의 자주적 자세의 문제와 역사의식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불교가 역사의 정신적 창조세력이라는 자각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말이다.
첫째 자주적 자세의 문제는 불교의 과업은 불교인의 책임이며, 불교인에게 부과된 과업은 불교인의 자각과 결속에서 이루어진다. 종교는 종교인 자신에 의하여 그 순수성과 전통이 유지되는 것이며 정치적 사회적 힘의 존재는 사뭇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순수성과 전통을 지키며 발전적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이것이 정치적 차원이나 사회적 세력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인 자신에 의하여 유지되고 함양된다는 자각이 절실하다. 주체적 자주적 역량이 없는 외부요인의 개입에 따른 진전은 그것이 어떤 성격의 것이든 심히 위험스럽다.
한국불교가 스스로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거 회고조 일색이라면 오늘의 정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모름지기 전통이 창조적으로 전승될 뿐만 아니라 발전적인 미래상이 생동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불교는 대체로 이러한 자주성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러한 주체적 권위를 발전시키자면 종교적 힘의 구축이 필요한데 이 점에 있어서 한국불교는 거의 조직 이전 상태에 있다 하겠다. 한국불교의 통일적 형태는 찾아볼 수 없고 종단이라는 이름 밑에 대개는 개개사암의 활동이나 개인적 활동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물론 극소수의 예외는 있다.) 개인이나 기개사찰의 목소리로는 그것이 한국불교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것이며 한국불교라는 거창한 전통이 살아서 계승되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지 않은가. 한국불교는 자주성에 있어서나 조직성에 있어서나 종단형성 이전의 원시성에서 하루 바삐 탈피하여야 할 것이다.

󰊸 역사의식의 문제
둘째의 역사의식의 문제인데 이것은 불교의 믿음과 본질적으로 관계되는 문제다. 불교는 스스로 깨닫는 종교며 이웃과 함께 깨닫는 종교며 국토를 깨달음으로 장엄하는 종교다. 그러므로 불교에 믿음이 있는 자라면 마땅히 그가 살고 있는 그 시대와 그 국토상황에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한다. 그 시대 그 국토에 대하여 바른 길을 비추어 바른 판단을 하고 역사의 방향에 대하여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자이어야 하며 민중으로 하여금 참되게 가는 자의 동행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국토 위에 깨달음의 진실을 구현시킬 책임을 다 하고 필경에 불국건설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현실마당에서 한 걸음 이루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불교인이 자신의 청정과 안정추구에만 골몰하거나 역사현실의 마당에서 진리를 위한 한마디의 증언이나 처방이 없다면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이러고서 어떻게 호국불교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불국토실현의 푸른 이상을 가꾸어 간다는 말인가. 오늘날 우리 불교계에 일신의 청정과 무사안일에 탐익하거나 자기 가정의 편안이나 자기 사찰의 흥성에 만족하여『이만하면 불자다.』하는 사람이 많다고 보는 것은 잘못일까.
불교는 사람을 바로 세우고 역사를 바로잡고 시대를 진리로 가꾸어서 한결같이 자타가 함께 불도를 이루어감이 그 근본자세인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이 원초적인 신앙자세가 공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