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일본불교의 略史

특집Ⅱ: 일본불교의 어제와 오늘

2007-10-26     관리자

일본열도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는 귀문(龜文)문화시대, 미생(彌生)문화시대, 고분(古墳)시대 등이 있었다. 내세신앙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고분시대이다. 이 시대에 샤마니즘〔무속신앙: 巫俗信仰〕에 의한 신에 대한 관념이 생기면서 씨족신의 신앙이 전개된다. 5․6세기 경의 이 씨족신앙은 씨족의 단결과 독립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차차 새로운 신앙를 필요로 하는 씨족이 나타나게되었다.

그리하여 6세기 전반에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두 개의 씨족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두 씨족이란 대신 소아(蘇我)씨와 물부(物部)씨 였으며 물부씨는 국신을 존중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반하여 소아씨는 이미 불교숭상은 국제적인 경향인 것을 왕에게 진언하였다. 이때 소아씨는 한반조에 귀화해간 많은 사람들을 배경으로 대화국(大和國)에 사찰을 건립하고 승니를 배출하였으나,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였다기보다는 일본의 국신보다 불교가 더 효과적인 의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비조(飛鳥)문화를 창조하게 된다.

6세기 말엽, 스이꼬(推古)천황의 섭정이었던 성덕(聖德)태자는 고구려의 혜자(惠慈)스님, 백제의 혜총(惠摠), 관륵(觀勒)스님들에게서 불교를 배웠다. 태자는 스이꼬여왕에게 승만경, 법화경을 강의하였으며 헌법17조를 제정하고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역대천황은 불법을 흥륭시키기 위한 소명(詔命)을 내리고, 황실과 호족은 불상을 조성하고 사찰을 다투어 건립하니 불교는 일본의 국가통일의 일익을 담당하기까지 융성하게 된다.

7세기 말경 중앙집권국가의 율령체제가 확립되면서 나라(奈良)의 불교는 이 체제 하에 편성되니 승니통제․사원감독 등의 법령과 제도가 만들어졌다. 모든 승니는 국가의 통제아래 득도할 수 있었고 그 기능은 국가 불교의 주술적 기능을 다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간에 나가 포교하는 일은 금지되었고 불교교리의 인과설마저 설법할 기회가 없었다. 예외로 행기(行基)보살은 민중에게 불교를 설법하다가 수행자가 많아지니 그 탄압이 극심하였다. 말하자면 국가의 불교정책은 진호국가의 불교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8세기 경에 이르러 정치적․사회적 불안이 속출하게 되니 천황은 국가사회의 안정을 기원하기 위하여 국분사(國分寺)를 건립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이에 대한 모든 경비와 재산을 기부하고 승니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동대사(東大寺)의 대불(大佛)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조성하면서 이 동대사를 중심으로 많은 국분사는 지방의 거점이 되어 불교의 관립사원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한편 승려의 정계진출도 일시적이나마 나타나서 도경(道鏡)은 법왕의 위치에 앉아서 실권을 잡고, 불교보호정책을 추진시켰다. 이러한 정책 아래서 나라(奈良)의 사찰을 중심으로 교학연구가 성행하게 되니 이른바 삼론종․성실종․구사종․화엄종․법상종․율종의 남도육종(南道六宗)이다.

그러나 8세기 말엽에 이르러 서울을 평안(平安)〔지금 京都〕으로 옮기면서 불교정책은 엄격한 통제정책으로 바뀌어지므로 사원건립마저 제한되었다. 이런 시기에 나타난 것이 최징(最澄)과 공해(空海)의 두 사람의 고승이다. 이들이 개창한 것이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眞言宗)이다.

일본불교의 조류는 이 양종파부터 시작된다. 천재종의 종조인 최징(最澄)은 비예산(比叡山)에서 수행정진하다가 당나라에 가서 천태종의 제8조로서 보살계를 받고 귀국한 후에 천황으로부터 일본천태종을 독립시킬 것을 공인받았다. 그러나 원돈계단(圓頓戒壇)의 독립과 삼승일승권실(三乘一乘權實)의 문제로 정치․교학양면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동대사(東大寺)에서 받은 250계를 버리고 대승보살계인 58계의 계단을 설립하려고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 그의 시적 후에 칙허를 받게된다. 천태종의 국비장학생은 2명이었는데 하나는 지관업, 하나는 차나업을 수행하며 12년간 비예산을 내려오지 않고 국보(國寶), 국사(國師) 국유(國有)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또 진언종(眞言宗)의 종조인 공해(空海)는, 당나라에 들어가서 불공삼장의 제자인 혜과(惠果)로 부터 정통의 밀교를 전수하고 진언종의 제8조로서 귀국하였다. 고야산(高野山)에 금강봉사(金剛峯寺)를 건립하고 진언종의 근본도량을 삼았으며 교육․사회사업에도 공적이 많다. 이들 두 종파는 각각 천태밀교․진언밀교를 대성시켰으며 평안(平安)불교의 밀교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밀교의 주술기도는 일본불교계의 상하각층에도 침투하여 갔다. 이 고대에 발생한 뚜렷한 사상은 신불습합(神佛習合)사상이다. 본지수적설(本地垂迹設)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것으로서 신은 보살로서 부처님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토교의 전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천태의 사종삼매(四種三昧)의 하나인 상행삼매(常行三昧)에서 염원하는 염불신앙이다. 천태종 염불을 민중화하는데 뚜렷한 업적을 낸 것은 11세기의 양인(良忍)이다. 그는 성명범패(聲明梵唄)를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후세에 그의 염불을 융통염불(融通念佛)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정토교도 12세기 경의 가마꾸라(鎌倉)불교에 와서는 시대사조의 영향을 받아서 이원적인 사상이 되고 있다. 소위 자력염불이냐 타력염불이냐 그리고 성도문이냐 정토문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경향을 가진다.

가마꾸라(鎌倉)불교의 특징인 선택(選擇)사상은 이런 모순된 사조를 근거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 선택사상은 전수(專修)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초의 전수염불은 정토종의 법연(法然)이 주창하였다. 창명염불(唱名念佛)로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누구나 아미타불 계신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이다. 이 정토종은 법연(法然)의 제자들에 의해 많은 종파를 낳았으나 특히 친란(親鸞)에 이르러 새로운 전환점을 찾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선택이 아닌 불선선악(不撰善惡)불론선악(不論善惡)이라는 획기적인 사상이다.

선이라든가 악이든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입장이 아니라 선악의 두 개를 함께 하는 입장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라고 하는 입장을 말한다. 자력도 아니고 타력도 아닌 절대타력의 세계를 개현하고 있는 것이다. 후에 본원사(本願寺)를 중심으로 진종(眞宗)이라는 교단이 각지에 형성되었으며, 일본불교의 특징을 이루는 세습적인 제도를 성립시키고 세속적 교단이 되었다.

이 법연의 손제자에 배운 일편(一遍)은 친란(親鸞)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는데 말하자면 유행상인(遊行上人)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송염불(誦念佛)을 하고 전국을 유행하였으며 이들이 염불을 보급시킨 공적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시종(時宗)교단이란 이 일편(一遍)을 개조로 하는 민중의 교단이다.

가마꾸라(鎌倉)시대의 종파 중에는 선종(禪宗)을 들수가 있다. 영서(榮西)는 소년기에는 천태종 승이었으나 송나라에 가서 혜능계의 남종선(南宗禪)을 익히고 법을 받고 귀국하여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을 지어 선종의 흥륭을 도모하였다. 송나라에서 차(茶)나무를 가지고 와서 보급하면서 많은 장군 공가들의 귀의를 받으며 친밀한 교제을 가졌다. 이 시대의 승려로서는 가장 상층계급에 가까웠다. 그의 선사상은 선과 밀교와를 함께 닦는 것이었고 계율을 지키고 모든 사람에게 이를 가르쳤다. 정토교의 파계와 비예산(比叡山)의 파계풍조를 비판하면서 오로지 지계하면서 좌선하면 누구나 득도할 수 있다고 주창하였다. 그의 법은 송의 임제종 황룡파(黃龍派)를 잇는 것이었으며, 건인사(建仁寺)를 건립하여 일본임제종(日本臨濟宗)의 개산이 된다.

이 임제종에 대하여 다른 선종이 도원(道元)의 조동종(曹洞宗)이다. 천태종 출신 승려인 도원(道元)은 천태교학을 학습한 후에 임제종 영서(榮西) 문중에서 선을 익혔으나 만족치 못하여 송나라에 들어갔다. 조동종계의 여정(如淨)에게서 지관타좌(只管打坐)의 중요성을 배우고 귀국했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는 선에 관한 저술에서 좌선이 불법의 정문임을 밝히고 남녀귀천의 구별을 부정하고 득도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전수선(專修禪)과 순수선을 주창하였다. 선종․조동종의 명칭을 부정한 도원(道元)이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영평사(永平寺)를 중심으로 승단을 수립하여 출가자 중심의 순수선(純粹禪)을 계승하여 갔다.
이 가마꾸라(鎌倉)불교의 현저한 특색인 선택사상의 법화경적인 전개가 일연종(日蓮宗)이다.

서민출신으로 천태종에 입산한 일연(日蓮)은, 법화사상과 염불사상이 겸행되고 있던 평안(平安)중기 이후의 천태종의 신앙형태를 변화시켜 법화경만을 전수하는 일연종(日蓮宗)으로 성립시켰다. 법화경의 제목인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외기만 하면 부처님 공덕을 입을 수 있다고 설하였다.

특히 국가주의가 강하였다. 일본이 법화경을 전수하지 않고 염불․선․진언․율 등에 몰두하기 때문에 대륙의 몽고군의 침범을 받고 또 천재지변이 끊임없이 나라를 위태롭게한다고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에서 주창하였다. 그러면서도 재래의 일본신인 천조(天照), 팔번(八幡)의 두 신을 법화경의 교주 석가모니의 수적신(垂迹神)이라고 하여 신불습합적인 불교를 내세웠다. 6명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된 신연(身延)의 구원사(久遠寺)를 비롯하여 많은 유파가 파생하였다. 이와 같이 가마꾸라 시대의 새로 나타난 새불교가 관동(關東)지방을 기반으로 발생하면서 이 시대말기부터는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새종파는 차차 무가(武家)와 상층귀족들의 귀의를 받게 되니 구불교 교단보다 더 발전된 교단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새불교는 정권이 교체되면서 사회․경제․문화의 다방면에 영향을 끼치면서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데 사상적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강호(江戶)시대가 되면서 막부(幕府)는 사원법도(寺院法度)를 제정하여 사원승니는 강한 규제를 받게 된다. 이때에는 진종(眞宗), 일련종(日蓮宗), 기독교가 민중 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이들의 동향은 정치경제를 좌우할 정도였다. 막부(幕府)는 이중에도 특히 기독교 금지를 위하여 전국민을 사찰에 소속시키는 단가제도(檀家制度)를 확립하였다.

강호(江戶)정부의 학문장려정책에 의하여 각종파는 연구기관을 신설 또는 증설하여 교학을 진흥시키었으며 따라서 각종파는 많은 학자를 배출하게 되고 저술도 많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대장경(大藏經)이 개판되었다. 근대가 되면서, 명치(明治)유신 정부는 배불적인 불교정책을 행하였는데 그것은 국학자들의 유․불의 두 종교 배격론의 전개에서 기인하였다. 이제까지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設)에 있어서 불교가 본이고 신도(神道)가 적(迹)인 것이 더 우세하였으나 이 때에는 유교, 불교, 습합신도(習合神道)를 모두 배격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결국 신불분리(神佛分離)의 정책이 실시되고, 폐불훼석으로 번져갔다. 심지어 민속화된 6월의 중원(中元)․우란분회(盂蘭盆會)를 폐지하고 신도의 조선제(祖先祭)를 제정하고 승려를 환속시키기에이르렀다.

이러한 종교통제정책에 대하여 명치 5년에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서본원사(西本願寺)의 도지묵뢰(島地黙雷)는 정부에 건백서(建白書)를 수차 제출하므로서 결국 명치 22년에는 헌법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대정(大正)기에는 불교의 근대화가 요청되니 종래에는 좁은 사원세계에서 논의되어오던 불교가 일반사회에서도 자유롭게 토론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에는 세계에서도 가장 불교연구가 활발한 일본의 불교로 발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