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을 버리고 敎에 들다

老師의 雲水시절

2007-10-26     관리자


󰊱 용성화상의 방망이
금강산 신계사 미륵선원에서 정묘년(二二세) 여름안거를 마치자 나는 또 서울 봉익동 대각사(大覺寺)를 찾아갔다. 용성(龍城) 조실스님을 뵙기 위해서다. 용성 조실스님은 그 무렵 화엄경 번역을 하고 계셨고 대중에게 매일 화엄경 법문을 하고 계셨다. 나는 그밖에 조실스님께 청하여 능엄경 법문을 따로 들었다. 경을 배우지 않았던 나는 경을 배우면서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고 경의 말씀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바닥부터 점검하는 계기도 되었다. 봉익동 대각사에 봄 한철을 지내면서 법문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화두를 분명하게 타파하느냐 못하느냐가 유일한 생의 목적이었으므로 용성 조실스님을 뵙자 그동안 내가 얻은 경계를 드러내놓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의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들으신 용성 조실스님께서는 마침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직 멀었어요. 그런 것은 공부가 아니예요. 전부가 식(識)놀음이요. 그런 것은 모두가 참 공부가 아니니 모든 소견 다 버리고 화두만 힘써 드시요』하셨다. 사실 그때까지 오대산에서 얻은 약간의 경계를 소득으로 삼고 그것을 가지고 천지를 돌아쳤던 것이다. 용성 조실스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과연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 말이나 행은 탕탕 걸림이 없어도 사실 자신감이 없고 세밀한 점에 분명하지가 않았다. 용성 조실스님의 법문을 한동안 듣고 나서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자. 조실스님 말씀대로 오대산에 가서 다시 차분히 화두만 들자』하고 오대산을 향하였다.
나는 오대산에서 다시 一년을 지냈다. 화두에 전념하고자 힘을 썼었는데 역시 공부는 순일하지 못하였다. 약간의 경계를 통하여 얻은 경지가 앞에 드러나 화두가 순일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화두는 아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알지 못할 곳을 향하여 명백하게 차고 들어가는 것인데 그 무렵에 나의 공부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이런 것을 아는 장애〔所知障〕라 일러왔던 것이다. 약간 아는 것이 알음알이가 되어 화두에 대한 힘찬 의정(疑情)을 가로막은 것이다.

② 통도 강원으로 가다.
오대산에서 무진(서기 一九二八)년 여름까지 지내고 난 그때는 나에게 딴 생각이 일고 있었다. 『…… 세상에 이 법보다 좋은 법이 어디 있는가? 이것을 모르고 허둥대는 사람들이 불쌍하기 짝이 없다. 저 사람들을 포교하여 불법을 알게 하여야 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경을 배우지 않았으니 경을 배워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 좋은 법을 널리 펴기 위해서 경을 배우러가자……』
나는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생각해보면 그당시 나는 확철대오 하였다고 거침없이 큰 소리치기 에는 자신이 없었어도 그래도 불법 본분일사에 있어서는 무엇인가 후련한 것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때 선지식의 말씀을 따라 계속 화두를 들어 공부하여 최후 뇌관(牢關)을 타파할 생각을 뒤로 미루고 선방을 떠나온 것은 두고두고 유감이다. 나는 그 후 경도 배우고 포교도 하고 종단운영에도 참여하였지만 끝내 조사관을 타파하는 일은 오늘날까지 밀려온 것이다. 내 이 나이에 다시 이문제와 맞부딪혀야 하니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노릇이다. 저 때에 나의 경계는 분명 한 때의 바람이었다. 나는 그 바람을 타고 뿌리를 뺄 것을 놓쳤던 것이니 어찌 유감일 뿐이랴!
나는 무진년 가을(서기 一九二八) 통도사로 내려왔다. 통도사에는 나의 사형이신 오해련(吳海蓮)스님이 강원 강주로 계셨고 또한 그곳에는 우리 은사스님이신 한암 조실스님의 법답(法畓)이 열여섯 마지기가 있었다. 은사스님의 허락을 받아 학비는 법답수확으로 충당하기로 하고 통도사 강원으로 갔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당시 내 생각에는 다분히 범부심정이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을 배워 포교하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편에는 그동안 산중에만 살다가 이제는 사회대중과 접촉하고 싶었고 자기가 아는 것을 자랑도 하고 싶었고 남들보다 우월하게 잘되어 보고도 싶었다. 그때 나이 二三세이니 나이로 보아 그럴만도 하겠지만 젊은 독자 가운데 참선하시는 분들은 이 늙은이의 젊은 시절의 잘못을 참고로 삼았으면 한다.
통도사 강원에는 신미년 여름까지 三년을 지냈다. 강원에서 글을 배우는 동안 나의 공부는 많이 퇴실하였다. 공부는 원래 문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실답게 참구하여 실답게 보는 것인데 강원에서 이력 본다고 문자나 해석하고 이론이나 희롱하고 세월을 보냈으니 이런 문자나 이론 공부가 어찌 본분실지를 닦는데 상관이 있을까? 강원 삼년에서 얻은 것은 많았지만 그것은 잡동사니 뿐이요 자기본분을 빛낼 공부는 정말 멀어졌던 것이다. 나는 마침내 다시 선방으로 뛰어 나왔으니 그때는 二六세 되는 서기 一九三一년 신미년 여름이다.

③ 다시 대승사 선원으로
나는 신미년 여름을 지금은 경북이지만 당시 강원도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지내고 겨울철은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로 왔다. 그때 대승사에는 조실스님이 박금봉 스님이었고 박인곡(麟谷)․권석집․정혼해(混海)․정금오․이백우(白牛)․정전강(田岡)․박승순〔東庵〕스님 등 쟁쟁한 납자가 모였었다. 전강스님은 그때 영신(永信)이라고 하였다. 그때 용성스님께서 내려 오시어 보살계와 비구계 산림을 하였고 또한 화엄경 산림을 한 달동안 계속하였다. 그때는 수좌는 오로지 화두 한가지가 있을 뿐이요 문자 배우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었지만 용성 조실스님의 설법이라면 선방수좌던 누구던 모두가 열심히 경청하였다. 용성화상과 같이 깨달은 분에 있어서는 모두가 본분 한 물건을 밝힐 뿐이요 거기에 따로 선이니 교니 하는 분별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지금의 전관응(觀應) 스님이 경을 보러 왔었는데 그때의 이름은 지수(智首)라고 하였었다.
그 때 대중들은 제각기 한마디 이를만한 공부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진은 모두가 알뜰하게 하였다. 나는 선방에 돌아와서 정말 고기가 제가 살던 물로 돌아온 것 같은 심정이었다. 강원에서는 문자를 배우고 격한 토론도 해보았지만 모두가 마음에 차지 않아 흡사 탁한 공기 속에 있는 것 같았지만 선방에 나와 앉아 있으니 정말 사는 것 같았다. 나는 용성화상의 법문을 듣고 나름대로 애는 써보았다. 용성화상께는 강원에서 선방으로 나올 때 찾아 뵈옵기도 하였지만 대승사에서 뵈올 때는 각별히 친근할 수 있었다.

④ 대승사 소동
대승사에서 잊을 수 없는 소동을 하나 벌렸었다. 이것도 부끄러운 기억의 하나이지만 젊은날의 기억을 더듬어 적어본다.
그때는 여러 선방 자체 내에서 해제 때나 혹은 반산림 때에 조사언구를 두고 서로 문답하는 일이 흔히 있었지만 또 타 선원 대중에게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놓고 논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것은 참선공부하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 경계를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자기 안목이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보고 탁마하는데 중요한 수단이었다. 참으로 좋은 관례였다. 선방납자들 사이에 이런 풍습은 두고두고 전해줄만한 일인데, 근자의 선방이 그저 묵묵히 앉아 있거나 방선하면 먹는 타령이나 하거나 외호자에 관한 이야기나 세간사를 화제에 올리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한 번은 선방에 질문서가 배달되었다. 당시 통도사 백련암 조실인 운봉스님으로 부터의 질문서였다.
『꿈도 없고 생각도 없는 이러한 때 그대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는고? 속히 이르시요.』이 질문을 받고 납자체면에 답장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제각기 소신이 있는 터라 일제히 한 마디씩 써서 이를 모아 백련으로 보냈다. 그때의 답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으로 기억된다.
전강스님은 『하정(賀正)』이라 하였으니 새해 복많이 받으시오 하는 뜻이라 하겠고 금봉 조실스님은 『총상이초청(塚上異草靑)』이라 하였으니 무덤 위에 잡초가 무성하다는 말이 되겠고 정금오스님은 『할(喝)』이라 하였으며 이백우스님은 『사사지시(謝師指示)』라 하였으니 글 뜻으로는 스님의 지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나는 『편여일권(便與一拳)』이라 하였으니 주먹이나 한 대 맞아라 한 셈이다. 그 밖에 다른 분은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얼마 있자하니 회답의 평(評)이 돌아왔다. 전강스님에게는 『신부과장(新婦袴長)―신부의 치마자락이 길다.』나 성관에게는 『동갱무이토(同坑無異土)―한 구덕에 다른 흙이 없다.』백우스님에게는 『일상양시(一床兩匙)―한 상에 두 숫가락.』 그리고 운정〔금오〕스님에게는 『적과후장궁(賊過後張弓)―도적이 지나간 후에 활을 당긴다』라 하였고 금봉 조실스님에게는 『귀굴리활계(鬼窟裡活計)―도깨비굴에서 활개를 친다』라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금봉 조실스님의 답변에 있었다. 운봉스님의 이 평을 놓고 다들 모여앉아 다시 점검하였는데 전강스님과 금오스님이 금봉스님에게 화살을 들이댄 것이다. 『이런 안목가지고는 조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실스님을 맞대놓고 『스님이 이래가지고서는 어떻게 납자의 눈을 밝힐 수 있읍니까?』하고 들여댔다. 『조실은 내가 해야겠읍니다』하고 금오스님이 들여댔다. 금봉스님은 그 말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운봉스님의 평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불난은 발단이 됐는데 마침내 대중공사에 이르렀다. 그 결과 『금봉스님은 안목이 없으니 납자들 눈 멀린다. 그러니 조실로 모시지 않는다.』고 결의가 났다. 三일 동안을 조실에 가서 권고하였지만 끝내 타협이 되지 않았다. 三일이 지나서는 내가 일어섰다. 조실에 나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수좌의 눈을 멀리면 그 과보는 무간지옥에 갈 것이 뻔하지 않읍니까?』나의 말은 사뭇 강경했다. 『대중이 싫어하니 처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읍니다.』그때 나의 행동을 다 적을 수는 없다. 젊은 기운에 만용을 부렸다. 결국 금봉스님은 큰절에서 떠나 곁에 있는 묘적암(妙寂庵)에 가서 삼동을 지내고 그후는 상주 갑장사(甲長寺)에 가서 지냈다. 이렇게 되어 조실스님을 배척한 장본인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금봉스님이 떠나고 나니 금오스님이 조실이 되었다. 이것이 금오스님이 조실이 된 첫 번째 내력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