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타고 三千里

老師의 雲水시절

2007-10-26     관리자


⑴공부에 대한 평가
그날 밤은 내가 발광했던지 눈이 열렸던지 몰현금을 탓던지, 하여튼 어수선한 가운데 지났다.다음날 아침, 방선을 하고 나니 역시 간밤에 있었던 내 일로 해서 많은 말이 오고 갔다. 설봉(雪峰) 스님은 『관수좌가 애썼다』하고 위로해 주었고 한암 조실스님께서는 『그렇게 본 것이 기특하다』하고 대견해 하셨다. 이 자리에 있던 운정(정금오)스님은 사뭇 달랐다. 『그렇게 하면 젊은 사람 버릇 나빠집니다. 그거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식심이 발동한 것 뿐이고, 공부는 아닌데……』하며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것이 나에게 어찌 격려가 아니고 탁마가 아니랴. 다를 고마운 말씀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별 관심없이 있어도 게송이 줄줄 흘러나왔다. 막힘없이 시원스러이 글귀가 흘러나왔다. 나는 옛 조사스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 경계를 짐작할 량으로 보경록(寶鏡錄)을 모았는데 보경록은 조사공안을 송하고 평창한 것이다. 보경록을 보니 환히 내 경계를 거울에 비춰낸 것과 같은 것도 있고 개중에는 그 뜻을 알듯 말듯 한 것도 있어서 퍽 재미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조사어록을 읽고 제 경계에 빠져 헤매고 있는 동안 공부는 많이 퇴실하였다. 화두에 맞붙어 『조주는 어찌하여 무라 하였는고?』하는 것으로 목을 매달고 지내던 내가 사뭇 허랑하게 풀린 것 같은 상태가 되었던 것으로 지금 회상된다. 그 당시는 과거에 보았던 것이 거의 한 자 틀리지 않고 생각이 확연히 드러나기도 하고 온갖 생각이 오고 갔던 것이다.

⑵ 중대(中臺) 노전시봉 시절
그해 겨울은 오대산 중대에서 노전스님의 시봉을 하면서 지냈다. 우리 스님도 중대 노전에 와 계셨다. 마지 짓고 나무하고 세탁까지 겸한 공양주를 하면서, 한편 불공의식도 거기서 배웠다. 이것도 우리 스님, 한암조실스님의 분부에 서다. 그 무렵 내가 스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엇인가 말대꾸를 할랴치면 스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 말 하지 마라. 그것은 알음알이다. 그런 알음알이가 쉬어야 한다. 알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깨칠려고도 생각하지 마라 오직 화두만을 힘써 들어라』하시며 친절하고 또한 단호하게 일러 주셨다. 나는 중대에서 시봉하며 지내면서 금강경, 법화경, 기신론을 틈틈히 배웠다.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았는데 한 마디 하려 하면 스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름다왔던 시절이고 행복한 시절이고 고마운 우리 스님이었다. 이런 선지식 밑에 있는 행운을 잘 소화하였던가를 돌이켜 볼 때 당시는 했노라 하고 힘썼지만 역시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뉘우친다.

⑶ 금강산 白雲道人
겨울을 지내고 나니 정묘년이다. 그때는 내나이 二十二세다. 금강산에는 많은 선객이 있다고 하고 수좌라면 으례 가보는 곳이 금강산이 아니었던가. 나는 얄팍한 알음알이에 그냥 바람(?)이 들어서 위풍 당당 금강산으로 갔다. 금강산 마하연에 이르니 그때 주장은 백운 스님이었다. 백운스님은 철원 보개산 심원사 스님이신데 나이는 한 六十세는 되어 보였다. 당시 백운도인이라는 호를 얻고 있었으며 선객 五인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나는 백운스님이 수좌라는 말을 일찍이 들었기에 마하연 마당에 들어서면서 『백운아, 백운아』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그랬더니 키는 짝달막하고 사뭇 인자한 모습의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허허, 오늘 구름이 끼더니 또 산도깨비가 나왔구나』한다. 나는 대짜고짜 물어댔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속도(速道)?』(조사라 서쪽에서 온 뜻을 속히 일러라) 백운스님은 마루에 주저하고 서 있다. 나는 질풍같은 기세로 그의 턱을 손으로 치면서 『이것도 모르며 여기서 뭣 하는 거요?』고 욱박질렀다. 백운스님은 나의 기습에 몸이 휘청거리다가 일어서면서 『허허, 날이 흐리니 과연 산도깨비가 왔구나』한다. 백운스님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담담한 그리고 다정한 얼굴이다. 내 손을 정답게 잡으면서 『내 평생 오늘에야 좋은 도반을 만났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하는 말이다. 『어디서 왔어?』『오대산 한암 스님 회상에서 왔읍니다.』오대산이 한암 조실스님이 계시다는 말은 벌써 널리 알려져 있어서 백운스님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과연 용생용자(龍生龍子)요 봉생봉자(鳳生鳳子)로다. (용이 용새끼를 낳고 봉이 봉새끼를 낳는다) 』하였다.

⑷ 석두스님과 미륵선원
나는 금강산 마하연에서 백운도인을 만나기 전에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보덕굴(普德窟)을 두루 돌아본 터였다. 백운도인을 하직하고 비로봉에 오르니 그 감개를 무엇으로 헤아릴까. 나의 말고 글은 결코 내 감회를 적어 주지 못한다. 그때 이런 게송이 나온 것을 기억한다. 천장만장봉(千丈萬丈峰) 아등가일층(我登加一層)
무갈금하재(無渴今何在) 만이천봉수(萬二千峰秀)
(천길만길 봉우리 위에 내 한층 더 하여 여기 올랐네.
법기보살은 어디메 있는고? 일만이천 봉이 빼어났구나)
나는 다시 신계사(新溪寺)로 갔다. 당시 금강산 도인으로 이름이 났던 임석두(林石頭)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석두스님은 신계사 건너편 보운암(普雲庵)에 계셨다.
석두스님은 풍골이 준수 청아하고 기상이 당당하였으며 목소리가 철성이었다. 글은 짧았다고 하나 참선하여 지견이 나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는 보운암에서 석두스님을 만나자 인사드리고 물었다. 『금강산에는 석두가 많다 하는데 그 많은 석두 가운데 어느 석두가 진석두(眞石頭)입니까?』석두스님의 대답이다. 『자네가 한암 상좌인줄 내가 알아! 우리 새 상좌하고 올여름에 여기 선방에서 잘 공부나 해!』내가 대꾸했다. 『그래 그것이 진석두요?』또 석두 스님 대답이다. 『그래, 한암 상좌가 다르구나.』
석두스님과의 수인사는 이렇게 끝났다. 신계사 곁에 있는 선방은 미륵선원이라 하였다.
그 자리가 미륵암이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에 미륵선원에는 이백우(李白牛) 이운봉(李雲峰) 이효봉(李曉峰) 현패룡 박승수(朴承洙) (후의 동암(東庵)스님) 그리고 나 조성관. 이래서 五인이 결제하였다. 여기서 효봉스님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효봉스님은 한 번 앉으면 다섯 시간은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사람은 대개 세시간씩, 나도 효봉스님 따라 一좌 五시간씩 정진하였다. 효봉스님은 방선 후에도 말이 없었고 식후 차 마시는 시간 외에는 묵언으로 일관하였다. 정말 그 정진력은 대단하였다. 반살림까지 이렇게 정진하니 정진이 결코 허망할 수는 없었다. 반살림 후에 모여 제각기 한 마디씩 소견을 말하였는데 그 때 이미 효봉스님은 눈이 열려 있었다. 다음에 기억을 더듬어 그당시 대중의 一구 법문을 적어본다.
효봉-서혈대우과(鼠穴大牛過) 어망백운리(魚網白雲罹)
…이것이 효봉스님의 초견성구라 할 것이다.
성관(나)-고공유성무자소(叩空有聲聞者少) 격목무성청자다(擊木無聲聽者多).
백우-관색관공(觀色觀空)

⑸ 효봉스님의 출가인연
효봉스님에 관하여는 한 말 할 것이 있다. 그의 정진력도 대단하였지만 출가도 또한 발심출가였다. 효봉스님은 그때 이름을 원명(元明)이라 하였다. 二년 전까지 지금의 고등법원인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있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를 다루는데 동족으로써 큰 고충을 느꼈다. 그의 출가동기에 대하여 내가 들은 바로는 이렇게 기억된다. 한 번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을 재판하게 되었는데 그의 인물이 너무나 뛰어났었다. 그런데 죄목인즉 만주에서 방화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스님 생각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죄주기는 정말 아까왔다. 그래서 묻기를 『당신같이 잘난 사람이 하필이면 살인방화를 했읍니까?』그의 대답은 태연하였다. 『살인 방화는 잘난 사람이나 하는 일이요.』이말의 의미를 효봉은 알 수 있었다. 곁에 있던 판사도 그렇다고 긍정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깊은 동정이 갔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해서 기껏해야 우리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죄주고 앉아 있을까 보냐』하는 자책심이 치밀어 올라왔다. 이래서 아무에게도 말없이 그 자리에서 나와 엿장수를 하면서 전국을 돌아쳤다. 그의 깊은 가슴 속의 오뇌를 무엇으로 삭일 수 있었던가.
전국을 돌아보면서 생각하니 사람이 사람이 되어 할 일이란 불자의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시 도인의 호가 있었던 석두스님을 찾았던 것이다. 석두스님을 만나 참선이 사람의 할 일 중에 첫째 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자 천가지 만가지 생각이 일시에 녹아버렸다 〔萬念都灰〕한다.
신계사에서 중이 되어 병인년 보운암에 있다가 다음해 미륵선원으로 옮긴 것이다. 효봉스님이 동산․청담스님과 더불어 그후 불교 정화운동의 총수가 되고 통일 종단의 초대 종정이 되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