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원효사상의 현대적 성격

원효사상은 현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2007-10-26     이기영

원효가 알았던 불교는 절대로 이 현실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원효대사가 생각한 열반이라든가 그때 그가 생각한 불교의 최고 목적은 이 현실세계에 불국토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내가 서있는 지금 이 자리에 내가 당장 부처가 되고 세계가 당장 불국토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게 아마 가장 현대적인 성격일 것이다. 어떤 실존주의 현대 사상도 그것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원효는 늘 얘기하기를 극락정토의 문앞에 갖다 놓아도 그것을 내가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고 지옥의 문을 활짝 열고 너를 거기에 쓸어넣겟다 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하면 극락에 갈려고 불교를 믿고 지옥에 안들어 가려고 불교를 믿게 되기 쉽다. 그가 생각한 윤회관이라고 하는 것은 자꾸 이세계 저세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현상에서 그냥『아침부터 너 지옥에 가냐?』하고 얘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침부터 욕심 많이 부리면 그것은 지옥에 떨어진 것이니까. 옛날에 석가모니 부처님이『신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세계는 누가 만들었습니까.』물으니까『네가 화살에 맞아 죽게끔 되었는데 화살독은 누가 묻혔으며, 어느 놈이 쏘았읍니까를 물어가지고 생명을 건질 수 있겠느냐』하신 것과 마찬가지다.
원효대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다 깨닫고 난 다음에야 하화중생(下化衆生)하겠다는 생각 집어치우자는 것이다. 상구보리(上求菩提) 먼저 하고 그 다음에 하화중생(下化衆生)하겠다는 것은 원효대사의 불교가 아니다. 다 아는 것같은 얘기인데 사실은 이것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상구보리(上求菩提)는 항상 계속해서 해야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도 항상 계속해서 해야하는 것인데 하는 법을 모르면 할 수 없다. 먼저 상구보리 하는 길, 하화중생하는 길이 어떤 길이다 하는 것 정도는 이론적으로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절대 교학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론과 세속의 학문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 나는 지금 우리 불교가 이것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다. 선(禪)만 해 가지곤 안된다.
원효대사는 해심밀경을 참 좋아하셨다. 해심밀경에선 六바라밀을 전부 세 단계로 쪼개어 설명하는데 첫째 단계는 다른 사람들이 어찌 되었든간에 그들로부터 일단 자기를 옹호하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에선 남에게 선한 일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세째 단계는 중생 전체에게 이익이 가도록 하라고 한다. 보시를 하는 데도 처음에는 법시를 하라고 되어 있다. 법시(法施)․재시(財施)․무외시(無畏施)의 순서로 되어있는데 소승불교에서는 법시가 재시보다 우위에 올라 있었는데 해심밀경에 오면 재시가 더 높은데 올라가 있다. 이것은 법시하기 보다 재시가 더 힘들다는 얘기다. 무외시는 다른 말로 하면 요익중생(饒益衆生)하는 보시이다. 모든 중생에 전부 도움이 가도록 주라는 말이다. 그것은 목청으로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까지 강조하는 것이며 맨끝에 가선 네 생각은 일체 버려라고 하는 것이다. 보시건 지계건 언제든지 맨끝에 가선 내생각이라는 것은 하나도 하면 안되게 되어 있다. 내 생각은 완전히 없애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일할 수 있게끔되라고 얘기하고 있다. 원효대사는 그런 식으로 살았다고 난 생각한다. 자신의 명예를 생각했다면 아마 그 행동거치가 달랐을 것이다.
원효가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예를 또 하나 들겠다. 그것은 반야바라밀다와 관련된 문제인데, 지혜를 어떻게 닦아가야 하느냐 할 때 맨 첫단계는 이 세속의 연기에 관한 지혜를 충분히 갖추라고 했다. 그러니까 요새말로 자연과학․경제학․심리학등에 관한 세속의 연기에 관한 과학적인 지식을 먼저 얻으라고 강조하고 있다. 즉 분별지를 좀 해야된다는 말이다. 물론 무분별지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분석하면서 이 세상 이렇게 생겨가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좀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 진제 닦는 공부하라 하였다. 열반적정을 공부하라 했다. 그리고 맨 끝에 가서 지혜의 최고단계는 무엇이냐 할때는 요익유정혜(饒益有情慧)라 했다. 반야는 반야이되 요익유정하는 반야라야 된다고 했다. 지혜롭다는 사람․도통했다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못주고 귀찮아 하면 이거 곤란한 일이다. 이 현실세상에서 누구하고나 함께 살아가고, 그 사람이 왔다면 전부 화목해지고, 모든 일이 다 되고 그래야 되는게 아니냐? 원효대사는 그러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원효대사의 말씀을 따라서 열반․성불이라는 것은 모든 중생의 성숙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하고 싶다.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면 끝까지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사람이 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성불의 이상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앞으로 우리 불교가 그런 식으로 되어야 할 것같다.
원효는 그가 좋아한 승만 부인경에서 새로운 불교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것을 원효는 그대로 지켜갔을 것이고, 이 현실을 무시하지 않은 새로운 윤리는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첫째는 자기가 부처님께 지키겠다고 약속한 원칙은 절대 범하지 않겠다는 것, 둘째는 모든 어른들에 대해서는 절대 만심(慢心)을 내지 않겠다는 것, 셋째로는 모든 중생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효대사가 가지고 있는 윤리관이 현재에 가장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면 모든 재물은 오직 가난하고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만 받고 모으겠다는 것이있다. 이 현대에 얼마나 가치있는 교훈이냐? 재물을 나만을 위해서는 안모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모아야하고 그것은 또 일하면 모을 수 있다고 했다. 원효가 가장 중시한 불교가 이 여래장 불교이다. 인간이 바로 여래라 하는 입장에서 인간주의를 제창한 것이 원효사상인데 그것이 경제적 윤리에선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또 四설법을 나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하겠다는 것이다. 판단의 기준이 남에게 있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이렇게 남을 위한 남에 전적으로 바치는 종교다. 또 六바라밀도 자기만을 위해서 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기에서 새로운 윤리와 생활방식이 제시되는 것이다. 또 이런 게있다. 모든 고통중에 있는 중생을 버리지 않고 구해주겠다고 했다. 그것을 원효시대의 신라인은 했기 때문에 정치경제가 발달할 수 있었다. 불교만 믿으면 덮어놓고 되는 게 아니다. 올바로 믿고 실천해야 되는 것이다. 또 원효대사는 대자대비의 정신을 왜곡되게 하는 불교를 하지 않았다.
불교에서는 대자와 대비의 정신은 다르다. 대자는 잘 하는 사람 올려주는 것이지만 대비는 잘못한 것을 잘 하도록 때리는 것이며, 타인의 고통을 괴로워하는 것이다. 우리 불교는 아직 이것을 안했다. 마땅히 꺾어서 항복을 시켰고 마땅히 섭수할 사람은 섭수하라고 승만경에 나와있다. 그리곤 이어서 설명하길 이렇게 하는 것만이 정법을 오래오래 머무르게 하는 길이며 그래야만 이 세상에 선인의 수는 많아지고 악도에 떨어지는 중생의 수가 줄어져서 여기가 편안한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한 이론이다. 이런 불교를 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안했다. 삼계허망이라는 것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여선 안된다. 내가 끌고가면 다 희망있는 것이 되는데 자꾸 도피할 생각만 해갖곤 안된다. 아주 적극적인 불교가 원효대사의 불교다. 그러면서 정법은 내 목숨과 정신․재물을 다 가지고 지키겠다고 한다. 정법은 무엇이냐? 정법은 바라밀이다. 바라밀은 뭔가? 바라밀은 완성이다. 피안이 따로 있나? 이 차(此)를 피(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이 사바세계를 불국토로 바꾸어 버리면 된다. 마음이 깨끗하면 여기가 곧 불국토가 된다. 불국토를 어디가서 꾸어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려면 절복할 사람은 절복하고 섭수할 자는 섭수해야 한다.
원효가 가르치는 또 한가지 호소는 절대로 이기적 투쟁과 차별적 대립을 일삼지 말라는 것이다. 원효대사의 정신은 화쟁의 정신이다. 다투는 것을 없애는, 하나로 돌아오게 하는 정신이다.
싸우지 말라. 대립하지 말라는 얘기는 하나가 되라는 교훈이고 이 하나가 되는 원칙은 화엄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육상의 원칙인데, 완전히 한 무더기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라 진제와 속제의 둘, 진제에서는 하나지만 속제에서는 여러 가지 것, 이 여러 가지 것을 그대로 간직한채 언제든지 진제 그하나라고 하는 바탕 속에서 이 여러개 것들이 근본적인 하나라는 입장을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인 줄안다.
아까부터 말씀드린 것을 한번 더 부언한다면 해심밀경에 나오는 바와 마찬가지로 현대에는 현대에 알맞는 방편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불교가 앞으로 해야할 과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인 방편을 강구하고 더 큰 원을 발하고 힘을 기르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