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원효의 근본사상(元曉의 根本思想)

특집(特輯)/전통사상의 현재(現在)/佛光창간 1주년 기념 강연 요지(要旨)

2007-10-26     관리자조명기


⑴ 바다 같은 원효사상(元曉思想)
원효성사의 사상을 논한다고 하는 것은 그 호한하고 심오한 사상 체계와 방대한 저작을 집약하는 작업이어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억지로 쉽게 한말 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한마음 한 뜻으로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다른 잡념이 없는 맑은 마음으로 있는 이것이 원효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말을 바꾸면 우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어서 마음이 흩어지면 생명이 없고 마음이 모이면 큰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고 또한 원효성사의 뜻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성사는 부처님의 사상을 배우고 깨치고 또한 그 뜻을 널리 펴려고 애썼으며, 구체적인 많은 행동을 했다. 원효성사는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종류로 말하면 百여종이며 권수로 말하면 기백권이 넘는다. 오늘날 우리는 원효스님의 그 깊은 사상과 뜻을 다 알 수는 없다. 원효성사의 사상은 부처님의 교법과 같이 끝이 없고 한이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노력에 따라서 얼마만큼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원효사상이라 하지마는 그 중의 한 모퉁이를 말하는데 불과하다.
나에게 원효성사의 근본사상을 말하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이를 말할 수 없고 원효성사께서 친히 당신 사상을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을 들어 약간 말씀드릴 뿐이다.

⑵「화(和)」사상(思想)
원효스님은 당신 사상를「화(和)」일자(一字)로 요약해서 말씀했다. 그리고 그 뜻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쟁(諍)을 더 보태어 설명하였다. 쟁(諍)은 말로 다툰다 하는 뜻이므로 화쟁(和諍)은 말로 다투는 것을 서로 화(和)하게 한다는 뜻이 되겠고 오늘날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이론적인 투쟁을 화(和)하게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성사는 원래 인명론(因明論)․판비양론(判比量論)등 인도 고대 논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에 의하여 당신의 사상을 화정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화쟁(和諍)은「화정」이 옳은 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화쟁(和諍)의 쟁(諍)은 이론 투쟁이 아니라 간(諫)한다는 뜻으로서 그 음은「정」이 옳은 것이다. 간한다는 것은 싸우지 아니하고 좋은 말로 권하고 타이르는 것이다. 거기에는 공경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화쟁(和諍)은 공경하고 간하며 타이름으로써 화(和)한다는 뜻이 본래의 뜻이다.
원효스님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썼다. 원효스님은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대개가 경․율․론의 주석이거나 독특한 해설서인데 비하여 이 논은 원효스님의 사상의 집약서이다. 이것은 백가(百家)의 이론(異論)을 모아서 십문(十門)으로 분류하여 난점(難點)을 들어 판결하고 이점(異點)을 모아 정리(整理)하여 화회(和會)하고 이리하여 일승불교(一乘佛敎)를 건설하고자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니, 실로 한국불교의 역사적 자각이며 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십문(十門)이라 하였는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싸움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입장이 다르고 주장이 달라서 청․황․적․백․동․서․남․북이 서로 다투니 그 수가 한량이 없다. 소승불교는 유(有)를 말하고 대승불교는 무(無)를 말하니 여기에 필연 싸움거리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온갖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이다.
그런데 원효성사는 이에 대하여 화(和)를 주장하였다. 싸울 것이 본래 없으며 하나를 집하여 대립을 지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툼이란 서로의 입장을 집하고 상대가 되어 주장하는 것이니 절대적으로는 싸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원효 스님은 화(和)를 주장하다. 그래서 총화(總和)라 하는 것이다.

⑶ 행동적(行動的) 「화(和)」- 통화(統和)
그런데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는 원래 총화(總和)라는 용어가 없다.
총화라 하는 것은 모두가 화(和)하는 것이라 하지만 총화가 무엇이냐, 화(和)하려면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개 총화라 하면 모두가 화(和)한다는 뜻이니, 우리가 앉은 이 대로가 총화일지 모른다. 서로 밀고 당기고 대립이 없는 상태를 화(和)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안하고 서로 침범하는 것이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총화냐,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일없는 총화며 목적없는 총화라 할 것이니 그런 총화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여기서 글자를 바꾸어 총화가 아닌 통화(統和)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효성사의 화(和)는 이 통화(統和)의 의미이다. 총(總)이 형용사라면 통(統)은 동사의 의미를 갖는 것이어서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통(統)이 모으고 통치한다는 뜻을 가진자이므로 통화는 적극적으로 화를 모으고 화(和)를 통치한다는 행동성이 있는 것이다. 만약 목적 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다면 이것은 화(和)는 화(和)이지만 좀 이상한 화(和)이다.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하는, 행동하는 화(和)이어야 한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싸움이 싫다 해서 화(和)한다고 밥먹고 일도 안하고 잠만 자고 있다면 이런 화(和)야 말로 도저히 취할 수 없는 것이다. 표면상 화(和)보다도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그런 행동이 소중하다.
그러나 실지 이 세계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어항 속에 금붕어가 있는데 이 금붕어가 가만히 있는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금붕어는 신중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후좌우의 지느러미가 가늘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공기를 조절해서 또한 부양력을 가감한다. 이런 노력이 없이 금붕어는 물속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앉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없이 편안히 앉아 있는 듯이 보여도 몸을 가누고 앉아 있는데도 앞뒤 어느쪽으로든 쓰러지고 만다. 역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의 몸도 누워 있을 때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항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고 우주전체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활동하는 가운데서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통화는 화(和)에 대한 노력이다. 이 노력없이는 개인이 성립할 수 없고 사회가 성립할 수 없고, 우주가 존속할 수 없다. 이 노력을 불교에서는 정진이라고 한다, 정진 없이는 六바라밀이라는 보살도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를 위한 끊임없는 정진, 이것이 화정(和諍)인 것이다. 여기에 정진은 오직 노력하는 것 뿐이다. 오직 앞을 향하여 가고 가며 노력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한 사람이 기름이 가득 담긴 사발을 가지고 길을 떠난다. 그뒤에는 칼을 든 사나이가 따른다. 그리고 걸어가다가 기름 한방울만 흘려도 목을 탁 치기로 되어 있을 때에 이 기름그릇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험난한 길도 있을 것이고 들이나 자갈이나 가시덤풀도 있을 것이고 전후좌우에서 호랑이나 늑대가 덤벼 들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어려운 기름 그릇을 들고 왜 가야하느냐 하고 가는 것을 주저할지도 모른다. 곁눈을 팔거나 머뭇거리고 중단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和)를 위할 정진에는 그런 이유가 붙을 수 없다. 오직 성의를 다하여 쉬지 않고 노력하고 나아갈 뿐이다. 오늘날 서양 과학적 머리에 젖은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하느냐 의문을 던질 것이고 또 묘안을 써서 쉽게 기름을 가지고 가려고도 할 것이다. 부산으로 가는데 기름을 병에 넣고 마개를 단단히 하고 기차나 고속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가서 사발에 옮겨놓고는 한방울도 안흘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꾀는 서양식인 꾀이고 화(和)의 정진은 아닌 것이다. 화(和)에 있어서는 가는 그것이 생명인 것이다. 무엇때문의 이유가 붙지 않는다. 그래서 통화에 있어서는 화(和)보다도 한걸음 나아가 통(統)이라는 순수한 행동만이 강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론을 붙일 도리가 없다. 구태여 이론을 붙인다면 노력하고 행동하는 이것이 우주 전체이며 노력하는 이 찰나가 영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과거도 없다. 미래도 없다. 오직 현재의 찰라뿐이어서 장차 오는 미래도 또한 찰라일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순수하게 노력 정진하는 것이 바로 영원이며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진리라고 원효성사는 생각했던 것이다. 원래 우리의 생명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현재라는 이 찰라며, 다음 찰라도 또한 찰라이며, 또 다음 찰라도 또한 이 찰라일 뿐이다. 이 찰라가 전체이며 영원이다.

⑷ 통화연동(統和聯動)
우주전체는 이와같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 원래의 모습이다. 한 물건도 움직이지 않고 정지하고 있는 것이란 없다. 무엇이든 활동하지 아니하고 존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느냐, 그 방식이 어떠하냐하면 예를 들어 사람에 있어서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각각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원효성사는 이런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현대의 물리학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연동(聯動)이라 하겠다. 연동이라하면 모두가 하나를 이루어서 질서있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월세계를 왕복하는 우주선을 두고 말해 보자.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우주선이 八만개인가 얼마인가의 부속으로 조립된다 하는데 이들이 각각 완전한 활동을 하여 그 기능을 발휘할 때 비로소 월세계 왕복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있어 우주선이나 로케트의 부분품처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질서있게 조화있게 활동하는 것을 연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우주선에 있어 부속의 한부분만이라도 고장을 일으킨다면 어찌 되겠는가? 우주여행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연동의 의미와 그 의미를 이런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사진기를 예를 든다면 우리는 샷다를 누르면 사진이 찍힌다 믿고 있지만 사진이 찍히려면 샷다에서 광선이 영상을 반사해서 렌즈를 통하여 필립에 감광작용을 주는데까지 빈틈없는 일체적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 과정 중에 하나만 제 기능을 안하더라도 사진은 버리고 만다. 이와같이 통화적 활동에 있어서도 하나의 행동은 극히 중대한 것이다. 이상세계를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의 갈림길도 행동에서 결정이 나는 것이다. 이상을 요약해서 말씀드린다면 원효성사의 사상은 통화연동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이냐, 인생이 무엇이냐, 내가 무엇이냐, 네가 무엇이냐, 국가가 무엇이냐, 가정이 무엇이냐, 번영이 무엇이냐, 자유가 무엇이냐, 그 어떠한 물음에도 통화․연동이다, 통화연동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이 살 수 있는 길이고 우주가 성립되고 번영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므로써 건전한 사회가 건설되고 국가가 성립되고 개인이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효성사가 도달한 이 결론은 실로 영원한 빛인 것이다. 비단 신라시대에 있어서만 세계에 빛난 사상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크나큰 등불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이 진리는 영원히 세계 어느 시대에나 인류에게 광명을 안겨주는 진리인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이 가르침에서 겨레의 번영과 세계 평화번영의 길을 배워야할 것으로 믿는 바이다.

〔질문〕통화연동에 있어 일체 존재외(事象)상호에 우열이나 주종관계가 있는가?
답 우열이나 주종관계는 없다. 일체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