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 청란청법(聽蘭聽法) / 서정주

2007-10-26     서정주

지난번 대구(大邱) 경북대학교(慶北大學校)에서 무진장(無軫藏)스님과 내가 같이 강연(講演)하던 때의 일인데, 난초(蘭草)를 좋아하는 나인지라, 먼저 든 강연(講演)차례를 마친 나는 아직 내가 못가진 영남산(嶺南産)의 그것들을 구하러 바로 시중(市中)으로 빠져 나가려 했다. 이곳 강연이 끝나면 또 안동(安東)의 강연이 바로 이어 기대되고 있어서 무진장스님이 여기에 강연하는 동안 밖에 비인 시간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禮로 그 무진장(無盡藏)스님의 시작하는 이얘기를 잠깐만 듣다가 빠져나가려 한 것이 귀 기우려 듣고 있는 동안 어느새인지 또 거기에 골몰하고 말아 난초(蘭草)고 뭐고 깡그리 다 잊어버리고 끝까지 그의 설법을 열심히 다 들어내는 청법대중(聽法大衆)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강연회가 끝나자 기대되고 있던 안동행(安東行) 차(車)에 오르면서 나는 동승(同乘)하고 있는 무진장스님에게 나의 그「망란청법」(忘蘭聽法)의 처음 가진 경험을 비로소 말하며 유쾌한 웃음으로 그를 찬양해 주었다.
그랬더니 안동(安東)에서 우리를 마중하러 나온 젊은 시우(詩友) 김원길(金源吉) 군(君)이 마침 우리 옆에 있다가 듣고 『그건 그 반대(反對)로 구성되었어도 좋겠습니다. 망란청법(忘蘭聽法)을 망법청란(忘法聽蘭)으로 해두요』 한다. 들어보니 왜 아니리요. 그것도 역시 처억 잘 들어맞는 이 얘기다. 그래 나는 『맞네. 맞네 그것 자네두 아주 잘 들어 맞는 이얘기여.』하고 흡족하게 우스워 또 그를 찬양해 주었다.
그러다가 보니 내 마음 속에도 한 개의 운(韻)다는 일이 저절로 인듯 생겨 대두(擡頭)해 이르기를「청란청법이면 其어떻냐?」했다.
그래서 드디어 난초(蘭草)도 빼놓지 않기로 하고 일행(一行)의 양해(諒解)를 얻어 난(蘭)가게로 차(車)를 몰아 몇포기 차지해서 차(車)에 옮겨 실었다.
설법(說法)의 그늘에 아조 잊혀질번 하기도 했다가 설법(說法)위에 그 머리를 쓰윽 들어 내밀기도 했다가 인제 그 설법(說法)과 가즈런하여 겨우 내게 온 이 팔공산(八空山)과 은해사(銀海寺)와 울릉도(鬱陵島)며 지리산(智異山)또 지리산(智異山) 이웃 사촌(四寸)의 山의 난초(蘭草)들 이것들이 나와 현신(現身)의 붕우지교(朋友之交)를 맺도록 까지에 보인 삼단계(三段階)의 이 과정(過程)의 곡절(曲折), 그 곡절(曲折)속에 이게 있어 이건 또 이리 간절한 것이다.